가수 채동하 프로필 사망 나이 데뷔 SG워너비 활동 학력
채동하
蔡東河|Chae Dong-Ha|チェ・ドンハ
본명
최도식 (崔道植, Choi Do-Sik)
출생
1981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
사망
2011년 5월 26일 (향년 29세)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장지
경기도 광주시 신현동 673-1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
국적
대한민국
신체
179cm, 68kg, A형
가족
외아들(무녀독남)
학력
발산초등학교 (졸업)
화곡중학교 (졸업)
명덕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 / 전문학사)
경희사이버대학교 (글로벌경영학 / 학사)
종교
개신교
데뷔
2002년 11월 19일 채동하 1집 Nature
경력
SG워너비(2004년 1월 20일~2008년 5월 8일)
별명
별님, 동햄, 리다채
SG워너비의 음악은 셋이라서 영원한 음악이 아닙니다. 대중을 향한, 대중을 위한 음악이기에 영원한 음악입니다. 앞으로도 SG워너비의 음악은 대중 안에서 살아 숨 쉬며 가요계에 큰일들을 해 나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수.
200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대중적인 음악으로 전 연령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었던 SG워너비의 전 리더이자, 서브보컬을 맡았었다. 그룹 탈퇴 이후 솔로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2011년 5월 26일 향년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채동하 가수 활동
첫 솔로 활동(2002)
김형석에게 발탁된 이후 지패밀리(G-Family) 엔터테인먼트에서 약 2년간의 연습 기간을 거친 뒤, 2002년 'Gloomy Sunday'라는 타이틀곡으로 데뷔하였다. 첫 음악방송은 2002년 11월 21일의 뮤직뱅크, 실질적인 데뷔 무대는 2002년 12월 14일 윤도현의 러브레터였다. 이후 후속곡 '차마'로 방송활동을 이어가던 중 소속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다음해 3월, 솔로 1집 활동을 마무리한다.
여담이지만 데뷔 앨범이 당시 음반 판매량 순위 차트에서 40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는 점과 무대 영상에 채동하를 연호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보면 신인치고는 꽤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소속사의 부도로 인해 얼마 활동하지 못 했다는 게 더욱 아쉬운 부분. 유튜브에 활동 영상이 몇 개 올라와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음반 CD의 결함으로 인해 2만장을 전량 리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몇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치며 고대했던 데뷔였지만 소속사의 부도로 갑작스럽게 활동을 접게 되자, 대인기피증으로 한동안 집 밖에도 잘 안나가는 등 솔로 실패로 인해 상당히 힘들어 했었다고 한다.
SG워너비 (2004~2008)
이후 김광수의 GM기획으로 회사를 옮겨 활동 준비를 하다가 김용준과 듀오로 활동하는 플랜으로 변경이 되고, 마침내 김진호까지 들어오면서 3인조 보컬그룹 SG워너비가 결성이 된다.
2004년 타이틀곡 'Timeless'을 앞세운 정규 1집 <WANNA BE+>의 성공과 2집의 '죄와 벌', '살다가', 3집의 '내 사람' 등 연이은 히트로 SG워너비는 가요계 정상에 오르며 앨범 판매량 1위, 골든디스크 대상 3회, MKMF 대상 수상 등 그야말로 고공행진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팀의 맏형으로 리더와 센터를 맡고있던 채동하는 SG워너비의 얼굴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애절함이 묻어나는 특유의 음색과 잘생긴 외모로 큰 인기를 얻었다.
생각한 일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다 이루어졌다. 그래서 불만도 많았다. 야속한 마음도,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 내 눈에도 보이는 순간 결국엔 모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것이 행복했다. 그 기회를 준 것이 감사했다. SG워너비... 그 성공은 나에겐 생명이었다.
솔로 2집 <Essay> 中
2006년 3집 <The 3rd Masterpiece>으로 한창 활동 중이던 6월, 좌측성대마비로 고생하기도 했다. 전국투어를 막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걱정이 컸으나 이후 다행히 완치했다.
2007년 12월 14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아리랑'으로 대상을 받으며 오열하였다. 시기상 이미 탈퇴를 결정한 이후이기 때문에, 단순히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SG워너비로서 마지막임을 예감하고 여러 만감이 교차했던 것으로 보인다.
SG워너비 탈퇴
2008년 1월 2일 씨야의 이보람과 열애설이 기사화되었고, 곧이어 탈퇴설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26일, 일본 포니캐년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SG워너비에서의 탈퇴를 발표, 2008년 3월 27일 조영수의 <All star> 앨범 참여를 마지막으로 SG워너비를 탈퇴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2008년 2월에 엠넷에서 방송된 'SG워너비 도쿄스토리'에서 한 인터뷰에서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2007년 추석 즈음에 재계약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나왔고, 조율 과정에서 추후 활동에 대한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내부적으로는 이미 SG워너비 탈퇴가 확정된 상태였다고 한다. 2008년 1월에는 이미 소속사와의 법적인 계약이 종료된 상태였으나 김광수 사장과 본인이 생각하는 SG워너비의 몫을 채우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2008년 5월까지 콘서트를 포함한 SG워너비의 스케줄을 함께 소화했다.
한국에서 마지막 무대는 2008년 4월 27일의 인기가요 무대였지만, SG워너비로써의 마지막 공식 스케줄은 2008년 5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콘서트 <My Friend Forever>였다. (엔딩 멘트) 팀을 탈퇴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탈퇴 이후 2008년 6월 15일에 열린 SG워너비 울산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사랑하길 정말 잘했어요) 6월 28일 서울콘서트에도 참여 예정이었으나 일정 상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탈퇴 이유에 대해선 2008년 SG워너비가 출연한 라디오 스타에서 멤버 김용준이 '꿈이 있어서 나갔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했고, 채동하 본인도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탈퇴를 결심했다 말한 바 있다. 소속사는 SG워너비 활동에 전념하기를 바랬던 반면 채동하는 연기 활동을 원해서 팀을 나간걸로 한동안 알려졌었지만, 이건 순전히 회사의 언플이었다. 물론 SG워너비 스케줄 때문에 예정되어 있던 뮤지컬 공연을 취소한 사례도 과거에 있었으나, "연기자를 하려고 SG워너비를 나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문제의 언플 때문에 '혼자 잘 되려고 팀을 나간다'라는 비난과 억측이 채동하에게 쏟아졌으며 이런 오해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였다. 뮤지컬에 참여하게 되자 "드라마에 캐스팅되지 않으니 뮤지컬로 방향을 돌렸다"라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이니 연기자 루머가 얼마나 파다했는지 증명하는 셈.
당시 채동하는 SG워너비 탈퇴에 관한 여러 루머에 대해 "연기자 활동을 하기 위해 이적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못 박았다. SG워너비 시절부터 뮤지컬 활동과 연기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후에 인터뷰에서 털어놓길, 실제로 채동하는 탈퇴 이후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고 했다. SG워너비 활동시절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더불어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에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특히 다음 앨범의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심했다고 한다.
너무나 쉬고 싶었지만, 본인 때문에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동생들까지 쉬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본인만 재계약을 포기하고 팀을 탈퇴했다고 한다.
탈퇴 이후 활동 (2008~2011)
2008년 9월 뮤지컬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켠' 역할을 맡아 열연했고, 이때 뮤지컬 무대에 서며 다시 마이크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의 OST 순애보를 부르는 등 활동을 조금씩 이어나갔다.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마침내 2009년, 솔로 2집 <Essay>의 컴백 소식이 알려졌다. 그러나 8월 29일 쇼케이스를 앞두고 연습하던 중 목 디스크 판정을 받고 성대결절까지 겹쳐 활동을 연기하게 됐다. 당시 소속사 관계자는 채동하가 SG워너비 탈퇴 이후 "1년 4개월 만에 나오는 거라서 부담감을 많이 가졌다"며 "거의 신인처럼 트레이닝을 하면서 준비했는데 안타깝다"고 전했다.
2009년 11월에 늦게나마 컴백을 했는데, 컴백시기가 겨울로 미뤄지면서 타이틀곡이 원래 계획했던 미디엄템포 장르의 '너라서 사랑해'에서 발라드 '어떻게 잊겠습니까(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로 변경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재개한 활동이었지만, 결국엔 목 디스크가 발목을 잡아 준비한만큼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다.
특이하게 이 앨범은 에세이 형식으로, 채동하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과 직접 쓴 짧은 글과 심정들이 적혀 있다. 10년 전부터 써오던 일기장에서 발췌한 내용이 많았는데, 어릴 적 이야기와 SG워너비의 리더로써 겪어야 했던 심적 부담감 등 다양한 얘기가 담겨 있다.
2집 활동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약 두달 간 인도와 네팔에서 체류하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인도에서 본 한 장례식 풍경에서 화장 연기로 노랗게 물들은 하늘을 보고 마치 '바닐라 스카이'같다는 생각이 들어 즉석으로 노랫말을 지었던게 그 다음 타이틀곡의 유래.
2010년 9월 발매한 미니앨범 <D day>는 채동하의 손길이 많이 간 앨범으로, 작사작곡에 이어 프로듀싱까지 도맡았다. 수록곡'Vanilla Sky'에 대해서 채동하는 "발라드의 멜로디, 록의 리듬, 클래식의 과감함, BPM 147을 섞었다"고 표현했다. 또한 타이틀곡 하루가 미치고 역시 난이도가 높은 곡이었으나 음악방송등에 출연 완벽하게 소화하였다. 역시나 그렇게 오래 활동하지는 않고 들어간 편이었으나, 그래도 2집 <Essay>보다는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여 채동하를 기다려온 수많은 팬들의 성원에 보답을 했다.
2011년 1월, V.O.S에서 탈퇴했던 전 리더 박지헌과 '옴므듀엣'을 결성하고 '어제 같은데'라는 싱글을 발표하고 콘서트에서 라이브를 선보였다. 원래부터 듀엣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실수로 데모버전을 두 명 모두에게 보내게 되어 즉흥적으로 같이 하기로 한거라고. 한국에서는 각종 행사로, 일본에서는 콘서트로 점점 활발하게 활동해 나가며 다시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채동하 사망
2011년 5월 27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S아파트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옷방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로 숨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외부 침입 흔적이 없어 타살은 아니라고 추정되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5월 30일 부검을 실시했지만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종 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본인이 열심히 작업한 앨범이 건강 문제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냈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는 점 또한 채동하를 괴롭힌 것으로 추정된다.
5월 27일은 일본 도쿄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일본에서는 프로모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귀국한 사실도 소속사에 알리지 않아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까지도 일본 소속사는 채동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를 찾아 매니저가 자택을 방문했지만 인기척이 없어 119에 신고, 구조대가 출동하여 베란다를 통해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평소에는 짧은 외출에도 단정한 모습이었으나 자살 며칠 전부터는 초췌한 모습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 매니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자신의 콘서트에 대한 홍보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연락이 닿지 않는 와중에도 콘서트 준비는 속행되었고,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서야 소식을 들은 일본 측 스태프들은 입장만 기다리고 있던 수백 명의 팬들에게 채동하의 자살 소식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전달해야 했다. 공연은 생전 SG워너비 활동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담은 영상들을 편집해서 상영했고, 관련 스태프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추도문을 낭독하는 등 추모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팬층이 거의 30~50대 여성이라 눈물바다가 되었지만 다행히 큰 소란은 없었고 조용히 공연은 막을 내렸다. 당시 기준으로 한달도 안 남은 채동하의 생일에 맞춘 미니앨범 쇼케이스와 팬클럽과 함께 하는 생일파티 등이 이뤄질 예정이었다는 소식과 팬카페에 며칠 전에 올라왔던 밝고 기대감 넘치는 글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며, 더욱이 그의 사망 소식과 더불어 기부, 봉사 등 각종 선행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
소속사에선 채동하의 추모 앨범이 계획되어 있었고, 생전에 작업했던 데모곡 '눈이 기억하는 사람'을 발표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잊혀진 것을 보면 오보일 가능성도 있고, 질문한 흔적만 있다. 답변에 의하면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채동하의 죽음에 대해 전 소속사 김광수 대표는 안타깝다며, 팀을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나 채동하가 찾아왔을 때 ‘언제 SG워너비로 다시 한번 뭉쳐보라’고 제안하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면서 ‘팀을 나가보니 소중함을 알겠더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는 고인에 대한 예의는 갖다버린 언플이었고, 김광수의 만행을 아는 팬들을 그야말로 피꺼솟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사후
2011년 9월 SG워너비의 디지털 싱글 <사랑법>이 발매되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발표일이 채동하의 사망일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이었고, 작사가 안영민이 SNS를 통해 채동하에게 보내는듯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만, 발매일 자체는 일주일 연기되었다.
2011년 SG워너비의 "THE LAST" 콘서트의 '아리랑' 무대에서 그의 음성이 나오기도 했다.
2013년 김진호의 정규 1집에 채동하를 그리워하며 만든 '안개꽃이 수록되었다. 흐릿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결실인 안개꽃을 사람의 인생에 비유했다.
2013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김진호가 고인이 된 채동하에 대해 "여자친구처럼 세심한 부분까지도 날 걱정 해 주던 형이었다. 그런 형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형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라고 인터뷰했다.
2013년 10월 12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첫 출연한 김진호를 통해 잊혀가는 줄만 알았던 채동하가 다시 기억되게 된다. 이날 김진호는 추모 특집으로 채동하를 추모하며 SG워너비의 히트곡 '살다가'를 열창했다. "우린 마지못해 웃는 거겠지, 우린 마지못해 살아가겠지" 파트에서 채동하의 음성이 나오면서 감동이 더해졌다. 노래 후주 부분에 무대 뒤 화면에서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채동하가 김진호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를 기억하던 팬들에 큰 슬픔을 안겼다. 김진호는 최종적으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방송이 끝난 후에도 각종 음원 차트 상위권에 '살다가'가 랭크되고 '채동하'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함께 출연한 다비치 강민경은 "채동하는 자신과 이해리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잘 챙겨준 동시에 가장 많이 혼내기도 했던 선배였다."고 회고했다.
2021년 4월 17일부터 SG워너비의 놀면 뭐하니? 출연으로 큰 화제를 모으며 SG워너비의 대표곡들이 음원차트를 석권하자 덩달아 채동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회자되었다. 특히 많은 사랑을 받은 'Timeless'가 수록된 정규 1집의 앨범 커버가 채동하의 옆모습이어서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에 멤버들에게 선물을 주는듯 해서,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애틋함을 안겨주었다. 5월 21일 김진호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신호 같다"고 이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2021년 7월 28일 SG워너비가 출연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김진호에게 다시 언급되었다. '시공을 초월해 남긴 메시지' 코너에서 김진호가 말하길 SG워너비는 언제나 자신의 가족이며 김용준, 이석훈, 채동하 모두에게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해주고 싶다며 팬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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