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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용원 프로필 나이 데뷔 작품 활동 학력 근황

배우 조용원 프로필 나이 데뷔 작품 활동 학력 근황

 

조용원 프로필
조용원 프로필

 

조용원

趙容瑗

 

출생

1966년 9월 27일 (5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본관

한양 조씨

 

신체

164cm, A형

 

 

가족

어머니 노영희, 남동생 조용현, 조용훈

 

학력

서울미동초등학교 (졸업)

성정여자중학교 (졸업)

동명여자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연극학 / 학사)

와세다대학 대학원 (예술학 / 석사)

도쿄대학 대학원 (사회정보학 / 박사)

 

데뷔

1981년 미스롯데 인기상

 


대한민국의 배우.

 

원조 하이틴 스타로, 국내 인물정보 등에는 1967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66년 9월 27일생이다.

 

조용원 움짤조용원 리즈
조용원 리즈시절조용원 외모
조용원 리즈시절 미모조용원 미모
조용원 사업조용원 근황

 

조용원 학창시절

동국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조정동과 초등학교 교사 출신 어머니 노영희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가 중학교 1학년때 사망했으며 어린 자신과 두 남동생을 거의 어머니가 혼자서 돌보다시피 하였다. 활동 초기 하이틴 잡지에서는 가족을 소개할 때 아버지는 LA 거주중으로 표기되었지만 이후 인터뷰에선 정정되었다.

성정여중 3학년 재학 당시 같이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언니들이 탤런트 시험을 보러 갈 때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 참여하면서 따라갔다가 방송국 직원의 권유로 즉석에서 원서를 쓰고 응모하며 KBS 8기 탤런트로 선발되었다.

김희애, 전인화와 함께 중앙대 트로이카였다. 그 중 단연 원탑. 중앙대와 와세다대에서 과탑이었을 만큼 공부도 잘하고 연기도 잘했다. 조용원의 이야기로는 대학 1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머니와 자신의 치료비에 돈이 굉장히 많이 들었고, 유학 시절에는 수입원이 한정적이어서 장학금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조용원 연예계 활동

1983년 열아홉살의 가을

조용원이 나온 모든 작품중에서 가장 뛰어난 깡패 미모를 볼 수 있다.

 

1985년 여왕벌

이제까지 순정만화의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 역할을 맡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싸가지없고 대드는 이미지가 강한 역할을 맡았다. 이걸본 사람들의 반응은 저렇게 착하고 순진한 여자가 욕을 할 것같은 표정으로 화를 내니까 섹시하다고 했다.

 

1980년대 말 하이틴 스타 중에서도 외모는 물론 지성도 으뜸이었고 게다가 성실함과 겸손함까지 갖췄었다. 거기다 단순히 비주얼 뿐만이 아니라 연기력도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연예계가 아니라도 충분히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했을 거라는게 중론이다.

1980년대 중반 예쁜 페이스로 연예계를 휩쓸었던 스타로 1981년 만 15세에 미스롯데, 이후 KBS 공채 8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대표작은 1984년 땡볕의 순이 역으로 대종상 신인상,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특별상을 받았으며 이 때부터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85년 11월 1일 20세의 나이에 어머니가 운전하는 맵시나 승용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 중 화물차를 추월하려다 차가 가로수를 들이 받고 5m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해 전치 10주의 중상을 입는다. 이마에 52바늘을 꿰매는 상처가 남았고 이후 고려대병원에서 상처를 가리기 위한 성형수술도 받게된다.

약 8개월 정도의 공백 후 윤일봉 제작 이형표 감독의 먼 여행 긴 터널로 복귀, 이후 드라마와 영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MC, 진양화장품의 광고 모델을 하면서 다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다 1990년 4월 일본 와세다대 예술학 전공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흔히 교통사고와 동시에 연예계 은퇴, 일본 유학길에 오른 걸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1995년 말 즈음 다시 귀국해 영화 정글 스토리 등에 출연하지만 이후 극단 창단, 영화잡지 씨네버스 창간 등 제작자 및 사업가로서의 활동에 더 집중하게 된다.

 

조용원 표지모델조용원 표지모델 미모
조용원 소피마르소조용원 어린시절

 

영화 활동

개봉 시기 상 가장 앞서 있는 조용원의 영화 데뷔작은 1983년 7월에 개봉한 신입사원 얄개이다. 구체적인 촬영 시기에 따라 내가 마지막 본 흥남을 데뷔작으로 서술한 자료도 많이 있는데 내가 마지막 본 흥남은 1984년 4월에 비로소 일반 공개되었다.

당대 하이틴물으로 유명했던 김응천 감독의 열아홉살의 가을, 불타는 신록 등을 작업하면서 청순발랄의 이미지를 구가하지만, 땡볕 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게 되고 헐리웃 영화 출연 제의까지 받는 등 단숨에 최고의 신인 여배우로 자리 잡는다. 이후 이원세 감독의 여왕벌, 김현명 감독의 여자의 반란 등 성인 연기자로 입지를 굳히려는 중 교통사고가 일어나 활동에 차질이 생긴다.

1년도 안돼 복귀해 먼 여행 긴 터널, 사노, 이두용 감독의 고속도로 등을 작업하지만 모두 결과가 좋지 않았다. 특히 얼굴 부위의 상처가 조용원의 연기 자신감을 떨어뜨려 계속해서 카메라를 의식, 사고 전과 같은 풍부한 표정 연기가 많이 사라지게 된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뒤 출연한 작품들에서는 6년여의 연기 공백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영화 사랑의 종합병원, 정글 스토리, 일일극 욕망 이나 베스트극장 같은 단막극에도 여럿 출연했지만 모두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곧 사업에 더 집중하게 된다.

 

 

함께 작업했던 고영남, 이형표, 이두용 등의 감독들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감독으로 손꼽히지만 조용원과의 작업에선 이렇다 할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모두 조용원보다 앞선 세대 감독들로 커리어 후반을 향해가고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중후반은 여러모로 한국영화계의 암흑기였다. 외화 수입 쿼터에 따른 수준 미달 영화 제작, 노골적으로 대종상을 노린 작품들, 3S정책으로 인한 저질 에로영화 범람 등은 그러잖아도 시네필적인 면이 있는 조용원의 작품 선정을 더욱 힘들게 했고 교통사고 공백까지 겪으면서 결국 본인이 원하는 연기에서 많이 멀어지게 됐다. 1999년 쉬리를 시작으로 뒤늦게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됐지만, 정작 조용원은 연기와 많이 멀어진 생활을 시작한다.

조용원이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1987년작 키위새의 겨울은 김현명 감독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그는 여자의 반란 감독으로 조용원이 어머니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보호자 없는 신세가 되자 사고 전 작품을 같이 했던 김현명 감독은 조용원 모녀의 보호자를 자처, 밤새 간호하고 사고 뒷수습을 도맡는 등 모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고 한다. 붕대를 감은채 한 병실에 누워있던 조용원 모녀는 김현명 감독을 보는 순간 '우리 좀 살려달라'며 엉엉 울었다고.

이홍렬의 책에 의하면 일본내 한인, 영화계에서 이름처럼 조용하지만 꾸준히 활동했었다고 한다.

일본 유학 후에 중국 감독하고 같이 영화를 찍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여력위 감독의 2003년작 명일천애를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참고로 한국어로 연기하는 부분도 제법 있다.

 

일본 유학과 이후

1990년 4월 일본 와세다대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찌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해 공부와 병행하며 정신없이 이십대 초반을 달려온 조용원은 졸업 즈음에야 자신의 내면, 연기 등을 더 채우고 싶다는 뜻으로 일본 유학을 결정하게 된다. 유명세를 떠나 외국에서 고학하며 지내던 초기 1,2년간은 스스로가 정말 영화 주인공인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경향신문의 1996년 9월 1일 자의 내용에 따르면, 80년대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전에도 학점을 상위권으로 유지하면서 드라마와 당시 유행했던 예능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MC로 활동하는 동시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하루에 수면시간이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일어 한자사전을 하루 분량을 정해서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유학 직후에 환율이 폭등해서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허름한 집에서 아르바이트 생활도 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 있는 모친은 관절염으로 투병을 시작하여 마음 고생도 심했다고. 1991년 일밤 이경규의 몰래 카메라에 출연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진행한 프로그램인 '밤과 음악사이에'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후 대학원을 무려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인 동기들을 제치고 과탑을 찍으며 조기졸업을 하였다고 한다. 도쿄대 박사과정 진학 후 논문 준비를 할 1995년 즈음 완전 귀국하게 된다. 주제가 영화였고 한국에서 써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에서 였다고.

 

조용원 일본유학조용원 일본유학시절
조용원 셀카조용원 치마

 

그리고 일본에서의 유학을 바탕으로 오겡끼데스까 같은 일본어 교재 등 여러 책을 써 내기도 했다.

배우 변우민이 조용원과 만난 썰을 풀었었다. 변우민은 조용원씨와 같은 85학번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유명세 또한 굉장한 조용원씨에게 감히 말도 걸지 못했고 접촉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원이 부산에 있는 영화 땡볕상영관을 비즈니스 상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조용원이 변우민에게 전화를 걸어서 난데없이 너가 85학번의 유일한 부산사람이니 부산구경 좀 시켜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둘이서 부산을 구경하던 도중 갑자기 조용원이 자신의 고민과 슬픔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용원이 너무 일찍 연예계에 데뷔하게 돼서 힘들어 죽고싶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우민은 그녀를 말리려고 거짓말로 6개월 시한부라고 구라를 쳐 죽으면 안된다고 하고 자신은 거짓말을 맞추려 멀쩡한 몸으로 학교를 휴학했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 그것도 무려 2학기씩이나 휴학을 했다. 변우민씨 당신은 도대체... 물론 이건 양념이 많이 쳐저있는 얘기고 변우민도 인기스타였기에 연기활동 때문에 휴학했을 것이다.

다만 아주 은퇴한 건 아니라서 일본 유학 후에도 1996년까지 영화나 드라마에 간간히 출연했으며 1997년 뮤지컬 제작자로 전향했지만 실패했다. 그 외에 1988년 후반과 1989년 초반에는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여자 MC를 잠시 맡기도 했다. 일명 토토즐은 1985년에 첫 방송해서 1997년 폐지된 인기 버라이어티이자 오락 프로그램으로 1991년까지 남자 MC를 맡았던 이덕화의 부탁해요~로 유명하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EBS의 영화정보 프로그램인 '시네마 천국'의 진행을 수년간 맡기도 했다. 

동시에 기존에 살던 집을 팔고, 연극단 '원'을 창설하여 변우민씨와 함께 백일천사(101 1004)라는 연극과 다른 여러 연극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1998년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관객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패했다.

이후에는 씨네버스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씨네버스 운영당시의 인터뷰내용을 참고하면 굉장히 열심히 씨네버스를 경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하게 된다.

 

결재서류와 이력서들을 검토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보니 자연히 밥을 제때 챙겨먹는 것도 어렵다. 지난 달에는 위궤양 때문에 며칠 심하게 고생하기도 했어요. -매일경제 2000년 6월 2일자-

 

 

조용원 근황

2011년 지인의 말에 의하면 국내에 돌아와 비즈니스 활동을 준비 중이며, 방송연예 콘텐츠 제작자가 될 예정이라고 했다. 다만 결혼은 계획이 없다고 했다. 한창 나이에 불운의 여배우가 되었지만 새로운 꿈에 계속 도전하는 그녀의 자세를 보면 대단하다고 감탄할 만 하다.

2016년 4월 22일에 방영한 MBN 아궁이에서는 은퇴 이유가 3번의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조용원 팬카페에 올려져 있는 인터뷰 영상에 따르면 조용원 본인이 일본에서 사주를 봤는데 교통사고를 2번 더 당한다고 하였으며 이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그 이후에 자신과 운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2019년 8월 6일 SBS 불타는 청춘을 통해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스타 첫순위로 뽑았다. 이후에도 포털사이트에도 이슈가 되고 있다. 그 중 고정출연자인 나이대가 비슷한 최성국, 강문영, 김광규는 추억을 되새기며 직접 찾아보라는 과제를 주었고 죽전에서 보았다는 시청자의 댓글 제보로 찾아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조용원의 지인은 은퇴 후 한국에 있지 않고 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며, 조용원이 방송 등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고 전했다. 그래서 이들은 직접 연락하는 대신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이에 대해 메인 PD도 문자를 통해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조용원 인터뷰조용원 하이틴스타
조용원 근황2조용원 젊은시절 미모

 

조용원 작품 활동

조용원 팬카페에 활동중인 회원이 얼마 없으나, 자료는 풍부하다.

성격은 이름과 비슷하게 굉장히 말이 없고, 소심한 편이고, 다수의 친구들과 활발히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소수의 친구들과 매우 가깝고 깊게 지낸다고 한다.

'공부 못한 연기자'라는 말을 가장 듣기 싫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보통사람들 종영이 계속 미뤄지자 수험생활을 하기 위해서 작가 더러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여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1984.7.21 TV 가이드 인터뷰)

문학소녀이면서 학창시절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 싫어하는 과목은 영어라고 한다.(1984.1월호 입사생활)

최고 명문대를 지원 가능할 만큼의 높은 성적이 나와서, 본래 중앙대 연영과가 아닌 연세대 불문과를 지원하려고 했으나, 연세대에 진학할 경우 연예활동 때문에 부득이 결석이 잦아질 테고, 학생들이 '결강이 많은데 어떻게 학점이 나오느냐고' 데모를 벌이는 게 두려워 연세대 진학을 포기하였고, 또 다른 사학명문인 이화여대에 진학하려 했지만, 당시 이대에서 CF 출연과 연예활동을 학칙으로 금지했기에 결국 연예활동을 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중대 연영과에 지원하여 수석 합격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1985.2.3주간중앙)

'1984년 7월호 영레이디'잡지를 보면, 미인들의 아침식사라는 코너에서 다른 여성배우들은 자신들의 아침식사를 신나게 소개하지만, 혼자서 '공부하느라 아침 먹을 시간 없다.'라고 인터뷰한 패기를 보여줬다. 

 

 

굉장히 하얀 피부로 별명이 흰둥이였다고 여러 차례 잡지 인터뷰에서 밝혔다.

학력고사 점수는 320점만점에 272점으로 당시(1984년) 배치표를 살펴보면, 명문대에 지원 가능한 수준이지만 당시 눈치작전이라는게...(1985년 8월호 텔레비전)

강수연의 라이벌로 유명하며, 동명여고 동창으로 1966년생 동갑이다. 하지만 강수연은 야간 실업계라서 둘이 완전한 동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에서 3번의 교통사고를 또 당해서 얼굴을 또 다쳤으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고생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와세다 대학원에서 3번째로 조기졸업 했고, 일요일 일요일밤에 조용원 몰래카메라편의 MC인 최수종에 따르면 과 수석도 하였다.

이홍렬쇼, 10시 임성훈입니다 등 90년대 중반의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에서 일본으로 갔던 80년대 말 엔화가 폭등해 가지고 간 원화로 환전할 수 있는 엔화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돈을 아끼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싸온 김치냄새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여 아무도 없는 건물 계단에서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 남아있는 출연작

내가 마지막 본 흥남(1982): 조용원의 첫 영화. 굉장히 귀엽게 나온다.

신입사원 얄개(1983): 영화 자체도 웃기다.

열 아홉살의 가을(1983): 조용원이 굉장히 청순하고 예쁘게 나온다. 남주가 부러울 정도.

불타는 신록(1984): 버릇없는 양아치 여고생으로 굉장히 귀엽게 나온다. 영화를 보면 왠지 8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땡볕(1984): 얼굴이 햇볕에 다 타고 촬영장의 열악한 숙소에서 지내면서 제대로 씻지 못한 조용원이 그에 걸맞은 역할을 가지고 처절한 연기를 하는 것이 일품.

골패(1985): 이 작품은 조용원 팬카페에 가입하고 등업을 따로 하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조용원 비중이 상당하다. 문학 작품이 원작이고 가족 간 갈등을 기반으로 한 내용 전개도 무척 탄탄하다. 조용원 초기작 중에서도 굉장한 수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

고속도로(1987):  생긴 얼굴로 인기를 모았던 최재성과 조용원이 동시에 출연하는 영화이다. 조용원이 영화 내내 우울하게 나온다.

 

 

조용원 작품 활동

드라마

TV 문학관 소리의 빛(1982) - 드라마 데뷔작

TV 문학관 가면무도회(1983)

광복특집극 하늘은 알고 있다(1983)

보통 사람들(1983)

고교생 일기

광장(1985)

TV 문학관 골패(1985)

TV소설 사랑(1987)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1988) - 남지혜 역

욕망(1997)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흥남(1983) - 옥희 역

신입사원 얄개(1983) - 준희 역

열아홉살의 가을(1983) - 임다희 역

땡볕(1984) - 순이 역

불타는 신록(1984) - 유시내 역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 이화 역

여왕벌(한국 영화)(1985) - 정희 역

여자의 반란(1985) - 현주 역

먼 여행 긴 터널(1986) - 황혜원 역

고속도로(영화)(1987) - 이미옥 역

사노(영화)(1987)

키위새의 겨울(1987) - 수희 역

사랑의 종합병원(1993) - 정선주 역

정글 스토리(1996) - 약사 역(특별출연)

만날 때까지(1999) - 인혜 역

명일천애(2003) - 수에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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