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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연자 프로필 나이 데뷔 활동 대표곡 아모르파티 이혼 재혼

가수 김연자 프로필 나이 데뷔 활동 대표곡 아모르파티 이혼 재혼

 

김연자 프로필
김연자 프로필

 

김연자

金蓮子|Kim Yonja | キム・ヨンジャ

 

출생

1959년 1월 25일 (63세)

전라남도 광주시 사직동

(現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

 

국적

대한민국

 

신체

154cm, 47kg, O형

 

 

학력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중퇴, 명예졸업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종교

개신교

 

데뷔

1974년 〈말을 해줘요〉

(데뷔일로부터 48주년)

 

배우자

히로시 오카 (이혼), 김호식 (결혼)

 

가족

여동생 김수진

 

김연자 아모르파티김연자 아모르파티2

 


대한민국의 가수. 조용필과 함께 원조 한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물 가수이다. 일본에서는 8090년대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큰 성공을 거뒀고,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매우 높은 한국인이다. 2010년대 이후는 국내 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2016년 이후에는 아모르파티가 국내에서 역주행하며 대히트를 쳐 젊은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연자 화보김연자 활동
김연자 무대가수 김연자

 

김연자 고향 및 데뷔 전

1959년 1월 25일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에서 태어났다. 큰집과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엄마는 마당에서 김연자를 출산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김연자가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단골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 불러라"고 외쳤다고.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김연자에게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한다.

 

 

국민학교 3학년 쯤 큰엄마가 내일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2~3백원을 줬는데, 당시 김연자의 용돈은 10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 부르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동요를 불렀는데, 떨어져서 참가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한다. 참가금으로 큰 돈을 줬는데 상을 못 탔다고 큰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 선생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5년을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광주의 대표적인 노래 대회였던 <벚꽃 노래 자랑>에 친구 정우순과 함께 출전했다. 펄 시스터즈 등이 똑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니까 우리도 똑같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옷을 맞춰줬고, 인기상을 탔다. <벚꽃 노래 자랑>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던 프로그램이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시청을 했고, 그 후 수피아여자중학교에 입학하니 노래자랑에 나왔던 김연자를 알아봤던 학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 부장이었다. 선생들이 자주 교단에 불러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1973년 14세였던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는 열흘 정도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쇼를 다 보고 학교에 왔더니 수업 미달로 정학을 당했고, 아버지가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가서 가수를 하는게 어떻냐며 열차표를 직접 사줬고 한다. 엄한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거역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김연자는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미아리의 작은아버지 집의 작은 방에서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동생 4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허나 광주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가수 유망주였으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작은 아버지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다 떨어졌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쇼에 가서 조카가 노래하니 써주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모두 탈락. 나훈아 콘서트에도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고 한다.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따라서 상경하여 단칸방 사글세 살이를 시작했는데, 옆집에 부유한 수양엄마 집에서 매일 전축을 틀고 노래 연습을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 낙방하여 답답한 마음에 상경한 어머니를 따라 관악산 어느 절로 올라갔고, 그 절에 있던 스님이 '21세에 꽃가마를 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는 김연자가 출세하기 시작한 나이와 비슷하다.

동향 출신의 선배 가수 이영숙의 소개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에게 오디션을 봤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부른 것으로 기억한다는 김연자는 그 자리에서 드디어 합격한다. 하지만 말은 합격인데 가난한 집안에 수입이 없는 김연자의 처지를 안 사장은 데뷔가 아니라 회사 3층 공장에서 월급 2만원에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일을 시킨다. 일하다가 1시간은 2층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작곡가 김학송에게 노래를 배우며 지냈다.

 

 

어느 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한 평론가가 어느 카바레에 신인가수가 필요하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비어홀, 카바레 등 3곳의 밤무대에서 월 6~7만원을 받으며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유명 가수가 노래하고, 무명인 김연자는 한가할 때 노래를 했다. 당시엔 이미자와 목소리가 비슷해 '제2의 이미자'라고 내세웠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은 없었고, 딸이 가수가 됐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한다. 남들은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은 서울에서 노래를 해야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사회인이 되어버려 학생의 청춘이 없었다고. 결국 김연자는 경제적 가장 역할을 하여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한다. 물론 나중엔 가수가 되게 해준 아버지께 고마워한다고 한다.

 

김연자 젊은시절김연자 리즈시절
김연자 젊은시절무대김연자 광고

 

김연자 활동

무명 시절

1974년 동양방송(TBC) <가요 신인 스타> 오디션 쇼. 매주 금요일 예심에서 뽑힌 4명이 tv에 출연해서 우수 가수로 뽑히면 메달을 딴다. 메달을 따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 메달을 3번 따면 "신인 스타"가 되어 1년간 TBC 전속 가수로 활동한다.

TV를 보니 노래자랑에 의상을 입고 2절을 부르는 게 멋있어서 김연자는 출전하기로 결심했다. 김연자는 <9월의 노래>를 불렀는데 "패티김 노래 불렀지만 이미자랑 똑같구만"이란 심사평을 듣고 떨어졌다. 집에 왔는데 PD가 재도전해 보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저 그 노래밖에 모르는데요?"라고 김연자가 대답하자 PD는 그 노래로 다시 나오라고 했고 김연자는 나갔다가 합격했다. 패티김 노래를 고른 이유는 광주에서 노래자랑 여기저기 다녀 보니 트로트를 부르면 떨어지고 발라드를 부른 사람이 붙어서라고 한다.

합격한 뒤로 손진석 사장이 첫 음반을 취입해주었다. 1974년 8월 30일에 제작 발매한 데뷔 앨범은 그녀의 독집이 아니다. LP의 B면에 김연자의 노래를 넣고, A면에 민정일의 노래가 들어갔다. 김학송이 작곡한 《말을 해줘요》가 대표곡이다. 15세에 그녀의 첫 노래이자 앨범이었다. 

이제 김연자는 이 노래를 잊어버려 못 부르고 음반도 안 갖고 있다. 다행히 오아시스레코드 사의 마스터 테이프 디지털화 작업을 거쳐 유튜브에 공개되어 들을 수 있다. 공장 일은 신곡을 내면서 관뒀다.

 

다섯 번/세 번의 도전 끝에 1974년 10월 3일 <가요 신인 스타>에서 패티김의 「살짜기 옵서예」를 노래해 우승했다. 이 날을 데뷔일로 정했다. 당시 이 쇼에서 "신인스타"로서 최연소 기록을 세웠으며 김연자가 불렀던 다른 노래는 「수원 처녀」.

무슨 노래를 불러도 이미자 창법이어서 개성이 없다고 비판 받았으나 이미자는 그녀에게 드레스를 줄 정도로 아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지요. 그런데 가요계에 아는 사람이 없어 고생만 했어요. 생활비 때문에 나이를 속이고 카바레에서 노래 부르기도 했고요. 너무 빨리 사회인이 돼 청춘이란 것이 없었어요."

"우승하고 임하룡·한무랑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나갔는데 금방 잘렸어요. 제가 밤무대 행사를 뛰느라 목소리가 다 상했거든요. 가족들이 다 저만 바라보는데 먹고살 돈은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때 개그를 더 했으면 제가 연기자로도 진출했을지 모를 일이죠.(웃음)"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트로트를 부르다 보니 미니스커트 입고 노래하는 또래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1975년 같은 회사에 있던 송대관의 <해뜰날> 코러스 녹음한다. 여성 합창단을 원했지만 가난한 작곡가와 데뷔 후 히트곡이 없던 송대관은 돈이 없어 값싼 김연자를 썼다. “작곡가가 시간 있으니까 김연자와 동료에게 코러스를 해보라고 해서 했다. 나중에 송대관에게 ‘내가 코러스 했던 거 기억나느냐’고 물어봤더니, ‘기억이 안 난다’ 해서 섭섭했다”

 

 

1976년 MBC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출전했다.

함께 출전했던 당시 고1이었던 김란영 왈 : “당시 김연자씨 창법이 지금과 달랐어요. 간드러지는 게 아니라 성량이 아주 풍부했어요. 그렇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잘못 왔구나’ 싶었다니까요(웃음).”

하지만 김란영이 대상을 받고, 가수로 데뷔한다.

 

1976년 오아시스레코드 - <엄마의 노래 / 나를 보고 있네요>

1976.12.03 오아시스레코드 - <김연자 독집 "봄비가/낯선 얼굴들"> 제작

'봄비가'가 히트 조짐을 보이던 즈음 김연자가 일본에 갔다는 말이 있다.

 

1977년 TBC 「전국남녀가요신인 콩쿨」 우승

당시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란 말이 많았다. 일본의 토리오(trio)레코드사가 이성애 같은 한국인 가수를 데려오려고 서울에서 연 오디션에 김연자는 합격한다. 일본행을 어머니는 찬성하고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김연자는 당시 심적으로 힘들었고 밤무대 외의 비전이 안 보이던 생활과 가난을 벗어날 돌파구를 원했다. 비자가 안 나와 10달 이상 기다리다가 1977년 8월 일본에 간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일본어도 모르고 힘들고 외롭고 한국에 가고 싶다며 매일 울며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당시 직장인 월급이 12만 엔이었는데 전화세가 30만엔 나와서 회사한테 혼났다. 초기엔 향수병에 시달렸다. 술만 먹으면 집에 가겠다며 여권을 들고 집 밖에 서 있었다. 다행히 동네에 택시가 잘 안 다녔다. 그리고 한국이 욕먹는 게 싫어 참고 이겨냈다. "내 이름은 들리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니 나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1977년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한 《女の一生》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토리오 레코드사가 2만엔을 아사쿠사 공회당에게 줘서 첫 무대를 가졌다. 3년 전속 계약으로 회사가 월급과 의식주를 제공했다. 히트치지 못해서 스케쥴이 별로 없었다. 1년만에 일본어와 글에 능숙해졌다.

1978년 김연자는 방송에 출연했다가 훗날의 남편 金好植(김호식)과 처음 만난다.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다. 남편은 첫눈에 천생연분이라 느꼈다 했다. 김연자도 처음부터 끌렸기에 같은 성이지만 본관이 다름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는 재일교포 2세이자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지휘자이자 악단장. "제가 방송무대에 출연했다가 남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그때 나이도 어린데다가 낯선 외국 땅이라 모든 것이 쑥스러고, 기도 제대로 못 펴고 있었거든요.그런데 하루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한국말로 아주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는거에요.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바로 밴드 지휘자였어요. 그때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죠."

엔카를 부르면서 밝고 여리며 하늘하늘 꺾는 창법을 익혔다. 트로트 창법과 접목시켜 감칠맛 나고 독창적인 목소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1979년 2월 19일 오아시스레코드 - 김연자 독집 <두손을 잡아요 / 먼 훗날>

일본 소속사가 주는 월급은 25만엔이었는데, 20만엔은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봉투 붙여 생활비를 하고 연자가 보낸 돈을 모아서 빚을 보태 연립주택을 샀다. 김연자가 비자 때문에 6개월마다 귀국할 때마다 사글세, 월세, 전세로 집이 이사해 있었다.

일본 데뷔 3년만에 한국에서 재계약을 기다리는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일본 회사 사람에게 “3년 동안 히트도 못하고 월급만 나가는 가수"라는 말을 들었다.

훗날 김연자는 해고 사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할 일 없어 먹기만 했더니 턱이 3개가 될 정도로 살쪘다. 남 보기에 쟤가 가수 될까?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 같다. 일본 풍습을 전혀 몰랐어. 사고방식 차이로 매니저와도 많이 싸웠어. 수도 없이 허리 굽혀 인사해야 하는 풍습도 '아부'로 생각됐어. 당시 술집을 돌면서 한 곡 부르고 음반 한 장에 7백엔씩 파는 '밤의 캠페인'이 있었는데 너무 싫었어. 항상 '한국인'을 앞세웠지. 일본에 맞추려 하지 않고 '한국 사람인데 왜 저래?' 내 고집만 부렸던 것 같다. 그러다 79년 일본에서 먼저 활동하던 이성애 선배에게서 '로마에선 로마식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됐지."

"무명기간이 7년이었다. 4년은 한국 무명, 일본에서 3년 무명이었다." 귀국 후 김연자는 1년간 놀았는데,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던 남편이 김연자에게 생활비를 줬다.

 

김연자 화보3김연자 리즈

 

출세

1980년 11월 10일 <힛트레코드> 알잖아요 내 마음 / 둘이서 

김연자가 할일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데, 작곡가 김영광 씨가 메들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김연자 왈 "메들리가 뭔데요?"

1980년 12월 20일(or 1981년 5월 8일) 힛트 레코드에서 트로트 메들리 앨범 <노래 꽃다발 1집>을 제작 발매했다.

<노래의 꽃다발 제2집>(1981.6.5)은 김연자가 아니라 임종님이 노래했다.

1981.09.17 경향신문 기사엔 "노래의 꽃다발 1,2집이 불과 2~3개월만에 어렵던 오리엔트 레코드 사운을 만회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쓰여 있다. 이 앨범이 한국 최초의 가요 메들리 앨범은 아니다. 70년대에도 메들리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다만 이 앨범이 1980년대 한국 메들리 열풍의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들리 음반이 잇따라 발매된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stars on 45>라는 메들리가 인기를 끈다.

 

1981년 3월 13일 노래의 꽃다발 3집 발매했다.

360만장 팔렸다. 한국에 메들리 열풍이 일어났다. 다만, 360만장 판매는 공식 기록은 아니고 자체 조사에 길보드 차트까지 포함해서 추산한 기록으로 추정되며, 이러면 역대 최고의 단일 앨범 판매량은 조용필, 김건모가 아닌, 김연자가 역대 1위가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의 신곡을 담은 오리지널 음반과 타인의 노래를 왕창 넣은 메들리 음반은 판매량과 성격이 달라서 단순 비교는 부적절하다. 참고로 김란영의 메들리 음반 판매량은 3천만장이다.(어떤 기사에선 총합이 그런 것처럼 말하고, 어떤 기사에선 단일 앨범이 그런 것처럼 말한다.)

3집이 카세트 700만장 팔렸다는 인터뷰 기사도 있다. 만약 360만장 팔린 게 메들리 시리즈의 합산이 아닌 꽃다발 3집이면서 LP이고, 3집 카세트가 따로 700만장 팔렸다면 합계 1천만장을 넘는다.

MBC 라디오 박준형, 정경미의 2시만세에서 시청자가 "80년대초에 김연자 메들리 황포돗대로 시작한 음반 안 사봤으면 김연자를 안다고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자, 김연자는 그게 360만장 나갔다고 말했지만, 황포돗대로 시작하는 메들리는 노래의 꽃다발이 아니라 "노래 올림픽 1집"이다. 김연자는 "노래 꽃다발 이것 덕분에 집을 2채 샀다"고 덧붙였다.(지구 레코드 계약금을 포함한 얘기인 듯 하다.) 시청자의 말로 보아 김연자의 다른 메들리 앨범들도 많이 팔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기사들이 다 이 음반을 갖고 있었고, 걸어다니지 못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81년 <힛트레코드>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서울행 완행열차

1981년 8월 31일 ~ 9월 1일 노래 실은 관광열차 제1집 .

1982년 4월. 밴드 악단장 출신 재일교포 2세 김호식과 결혼했다. 남편은 18세 연상이며 자식이 있는 재혼. 김연자는 결혼할 때는 인기가 많지 않았고 메들리 앨범이 약간 히트 치려 할 때였다고 말했다. 

젊은 아가씨에게 장거리 연애는 쉽지 않았다. 곧 그녀는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을 서둘렀던 또 다른 이유는 비자 문제다.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매번 비자를 새로 받아야 했다. 그런데 재일교포인 남편과 결혼을 하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녀 표현에 의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얻고 비자도 얻는 일석이조 결혼”이었다. 한국에 머물며 결혼 비자가 발급되기만을 기다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자가 나오려면 6개월을 더 한국에 있어야 했는데, 그사이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음반 제작자 유수태 대표를 만나 음반이 잘 되면 계속 활동하고, 안 되더라도 일본에 가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취입한 그 음반이 대박이 났다.

 

 

1982년 6월 NHK 생방송 출연.

1982년 7월 9일 <오아시스 레코드> <김연자 신곡집 갈길을 못가네 / 남의 속도 모르고> 발매.

이때쯤 노래의 꽃다발 3집은 인기 폭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래 꽃다발 3집의 대박 덕분에 <지구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계약금 1억원 받았다. 한국 음악사상 최초라는 말이 있다.

1982년도 7월 21일 신문에서 지구레코드 신곡 취입 후 김연자 왈: "77년도까지만 해도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 가요계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러나 한번 결심한 길을 쉽게 포기하기도 아쉬워 실로 피나는 노력으로 좌절감을 극복했으며 그래서 이제야 겨우 가수가 된 것 같아요."

 

김연자 일본활동김연자 88올림픽

 

1982.08.15 <노래 올림픽 제1집> 제작.듣기 (지구 레코드)

1982.08.15 <노래올림픽 제2집> 제작

1982년 8월 25일 <노래올림픽 제3집> 제작

노래 올림픽 1~3집의 노래 백여곡을 하루에 녹음했다는 말이 있다. 3집에 적힌 제작일은 다르지만..

 

1982년 9월 20일 김연자 신곡 1집 제작.(지구 레코드)

정통 트로트 《진정인가요》(작사: 정욱/작곡: 정풍송)로 김연자 최초의 히트곡. 중박

 

1983년 6월 25일. <2집 망각> 듣기 <그런거야> 히트. 중박

1983 MBC 10대 가수 상

 

어머님께 50평 집을 선물했다. 84년도쯤에 사 드렸다는데 지구 레코드 계약금으로 돈을 댔다는 건 말이 좀 안 맞다. 아마 오래전 일이라 본인도 헷갈리는 듯하다. 어쨌건 이때 엄청나게 잘나가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1984년 9월 15일 3집 <타인의 얼굴 / 가면의 사랑> 발매. 여기 수록된 '수은등'이 한국에서 대박났다. 2021년이 된 지금은 '아모르 파티'가 유명해졌지만, 김연자의 대표적인 히트곡은 '수은등'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1984년 10월 19일, 한국인으로서 조용필에 이어 두 번째 NHK홀 리사이트를 열었다. 라이브 레코드 한일 동시 발매한다.

1984 MBC 10대 가수 상

1985년 7월 15일 제작. 김연자 4집 <당신은>

 

1986년 5월 20일 제작. 작년에 낸 4집에 2곡을 추가하여 4(.5)집 재발매.

새로 추가된 2곡이 올림픽을 위해 만든 <아침의 나라에서>와 씨름에 자주 나오는 <천하장사>다.

본래 <4집 당신은> 음반 뒷면은 김연자의 사진이었지만 천하장사가 수록되어 재발매된 앨범 뒷면에는 강호동이 씨름을 하는 사진이 실렸다. 이 시기의 강호동은 아직 프로 무대로 데뷔하기 이전의 유망주였고, 이만기가 잘 나가고 있을 때였는데도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정작 강호동은 2018년 tvn <토크몬>에서 "이 노래를 많이 듣고 불렀는데 원곡을 누가 불렀는지는 이제 처음 알았다. 자신의 사진이 김연자씨의 앨범에 들어간 줄도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연자도 그 사진의 주인공이 강호동인지 잘 몰랐었다고 한다.

김연자는 일본에 재진출하기 전엔 장충체육관에서 씨름 대회 때 <천하장사>를 노래하곤 했다.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MBC는 서울 올림픽 주제가를 공모한다. 이를 위해 전설적인 작곡가 길옥윤이 만들고 김연자가 노래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1986년 봄에 시청자 투표 결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가에 선정된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때부터 공식 주제가로 사용되어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에서 연주되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때는 캘거리와 서울을 위성으로 연결한 "우리는 올림픽" 생방송에서 소개되었으며, 캘거리 동계 올림픽 폐회식에서도 연주가 되었다.

 

하지만 1988년 6월에 서울 올림픽 주제가는 <손에 손 잡고>로 교체된다.

김연자가 88올림픽 폐막식 때 주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지만 공식 기록에는 없다. KBS 폐회식 녹화 중계에도 안 보인다. 다만 영상과 사진을 보아 식전행사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이 끝난 후 (다음날인 10월 3일 개천절로 추정됨) 88체육관(KBS아레나)에서 88 영광 서울 코리아라는 행사에서 김연자가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이 행사에서 다른 가수들도 다른 노래들을 불렀다.

 

 

일본에서의 성공

김연자는 <아침의 나라에서>가 올림픽 주제가니까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일본 재진출을 결심한다.

<아침의 나라에서>는 요시오카 오사무(吉岡治)가 작사한 <朝の国から>란 제목의 싱글로 발매됐다. 1988년 5월 일본 バップ VAP 레코드사에서 1절은 한국말, 2절은 일본말 가사로 취입하였으며,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발표되고, 5월25일 도쿄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88 서울 올림픽 공식 가요 발표회를 가졌다. 올림픽 찬가를 부른 가수가 일본에 왔다고 홍보했다.

1988년 6월 21일 갑자기 올림픽 주제가 변경이 발표되어 주제가 자격을 상실한 김연자는 크게 상심한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를 맡아 그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하며 김연자의 성공에 공을 세운다. 남편은 가요계 인맥이 많았고, 남편 때문에 김연자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어쨌든 이노래는 시판 2개월만에 10만장 이상 팔리며 히트한다. 덕분에 김연자는 일본에서 성공가도에 올라서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다.

다음 해인 1989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김연자 엔카김연자 엔카 무대

 

홍백가합전에 총 3번 출연하며 계속 히트곡을 내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엔카 가수 중 한 명이 됐다.

1989년 6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앙콜 공연.

당시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가 계속 ‘아침의 나라에서’ 풍의 노래를 하길 원했지만 김연자는 ‘엔카’를 부르고 싶었다. 일본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면 그들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재일)한국인인 미야코 하루미라는 유명한 가수 출신 프로듀서를 찾아가 일본 엔카를 부르고 싶다고 사정을 말씀드리고 받은 곡이 ‘암야항로(어두운 밤뱃길)’였어요.”

1989년 10월 5일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가 프로듀스한 신곡 暗夜航路(암야항로)발매. 인기가 없다가 6개월만에 인기 폭발해 그녀의 대표곡으로서 장수한다. 60만장 이상 팔렸다.

 

1990 일본 산토리홀 엔카 가수 첫 공연

1990년 8월 15일 소련 사할린 동포 1만명 야외 자선공연 <눈물의 아리랑(?のアリラン)>. 사할린에 거주중인 노인 10명을 한국에 초대. 김연자가 기억에 남는 특별한 공연 3가지 중 하나로 꼽았다.

1992년 9월 15일~25일 3회째의 브라질 공연. 상파울로시 의회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 공헌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안셰타장’을 수상. 상파울로시내에 ‘김연자 거리’ 창설의 명예.

1994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을 노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을 부르는 것을 보면 왜 일본에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짐작이 가능하다.(흐르는 강물처럼은 akb48의 제작자이기도 한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사곡임 야스시는 이곡으로 대 작사가의 반열에 오름 )))

1995년 10월 27일 발매한 싱글 ‘涙の鎖(눈물의 사슬)’은 엔카부문 테이프·CD판매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가요계를 평정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1997.2.23 미수교국인 쿠바의 수도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쿠바국립교향악단의 협연으로 공연. 한국인 첫 쿠바 공연. 클래식 위주인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팝송을 처음 부름. 동아시아 노래가 아닌 팝송, 스페인계 노래와 <아침의 나라에서> 부름.

2001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림진강>을 노래했다. 북한 공연을 준비하며 배운 노래다.

 

2001년 7월 일본 법무성 대상 수상

88년 이후 매년 한두 차례 교도소 위문 공연 하고 있다. 이 일로 법무성 대상을 받았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인데 저 역시 일본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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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연

2001년 <제19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 악단을 포함해 30여명이 북한에 갔다.

4월 7일 평양 청년중앙회관 안의 극장을 청년문화회관이라 하는 것일 수 있다.(2,000명수용)에서 처음으로 콘서트.

4월 9일 평양 국제영화제회관콘서트홀(2,500명수용)에서 콘서트.(김연자씨 말과 맞지 않아 실제 이뤄졌는지 불명. 이 날 공연이 없는 문헌도 있음)

4월 11일 함흥에서 김정일과 회견. 당간부 500명과 김정일 앞에서 2시간 공연. 종료 후 환영만찬회.

이 공연은 음반으로 발매됐다.

"원래 평양 공연을 3회 하기로 했는데(이틀 하기로 했다고 말하기도 함) 첫 공연 끝나고 두 번째 공연도 똑같은 회관에서 하기로 했는데, 뒤풀이 하는데, 간부들이 숙소로 와서 갑자기 높은 분이 뒤쪽으로 날 부르더라. "열차 타고 12시 출발해야 한다. 공연하러 가야 하니 무거운 짐은 호텔에 놓고 악기랑 의상 등 간단히 쇼할 짐만 빨리 챙기라.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말라." 회관에서 악기 가져오고 4월 9일 밤 12시 열차에 탔다. 좋은 침대도 있고 시설이 엄청 좋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김 위원장 전용 열차.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 8시30분쯤에 도착해 보니 함흥이었다. 김연자가 김정일 장군님 한번 뵙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저하고 남편만 또 차를 태워 또 어디로 이동을 시키더군요. 5분 늦게 도착해 한복 입고 대궐같이 엄청나게 큰 문이 있는 해변가 집 앞에 내렸다. 보초병들이 거대한 문을 열자 바로 거기에 김정일이 있었다. 엉겁결에 외쳤다. '와! 진짜다 진짜가 있다(어?! 실물이다 김정일씨!)'." 김정일이 문 앞에서 5분 기다린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현관 앞에 서 있던 김정일은 손을 내밀며 20년 동안 좋아했던 가수를 비로소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인민복 차림에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고 말투는 TV에서 보던 대로 힘차고 카랑카랑했다. 11일 오후 3시쯤 함경남도 함흥의 한 군부대 접견실에서 만났다. 오후 5시부터 90분 동안 대회의장을 임시방편으로 무대로 만들어 공연했다. 객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즉석인터뷰를 하는 등 북한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무대였지만 앞좌석에 앉은 김 위원장은 마치 심사위원처럼 미동도 않은 채 내 공연을 지켜봤다. 환갑인 김정일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더니 김정일이 몹시 부끄러워했다. "굉장히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다정하더군요. 공연 전에 40분 동안 같이 있더니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나는 김위원장의 오른쪽에 앉았다. 내가 공연 후엔 너무 지쳐 잘 먹지 못한다고 하자 그는 천천히 먹으라며 음식을 하나하나 놓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연자의 메들리 테이프를 김일성이 선물 받아 듣고 좋아했다고 한다. "옛 가요를 묶어 발표한 메들리 앨범에 대해 김정일은 '아버지(김일성)와의 추억이 담겨있다. 82년도쯤 같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정일은 81년 발매된 김연자의 '노래의 꽃다발' 메들리를 들은 후 열렬한 팬이 됐다고 했다. 20년 동안 김연자 노래를 사랑했다고도 했다.

한국 신문1, 2에 쓰인 김정일의 "김연자는 왜 안 데리고 오느냐"란 말을 김연자가 보고 '가야지' 해서 김연자가 직접 말해서 갔다고 김연자는 말했다.인터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무서웠다. 노인들에게 우리나라 옛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효 콘서트를 계획했다. ‘타향살이’,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젖은 두만강’, ‘홍도야 울지마라’, ‘대지의 항구’등 흘러간 대중 가요를 선곡했는데, 이들은 북한에서도 널리 불려지고 있어 호응이 좋았다."

그전까지 일부만 몰래 남한 노래를 듣던 북한이었는데, 김연자의 공연은 김정일이 공개했다. 4월 12일 조선중앙TV, 라디오방송인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이 녹화 방송했다. 이전엔 남한 가수가 북한에서 공연한 것은 tv로 중계되지 않았다. 별도로 방영된 예술인 대담 프로그램에서 만수대 예술단 지휘자 조정림 등은 김연자의 대단한 평판을 이미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노래를 직접 듣고 보니 과연 듣던 바 그대로라고 칭찬했다. 전통적인 민요 창법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여러 가지 창법을 잘 배합해 독특한 형상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농담을 잘했다. ‘녹두부침’ 같은 맛있는 음식을 남한에서는 왜 이상하게 ‘빈대떡’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해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김정일은 북한 노래는 성악식 발성으로 통일돼 있어 남한의 트롯과 같은 창법이 그립다고 했다. 이수미의 '두고온 고향'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이 애창곡이고 '찔레꽃' '개나리처녀' 등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남쪽 가수들 노래는 곡이 너무 빨라 뭘 노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전자음악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판하면서 이젠 그것도 싫증났으니 생음악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 했다. 다음 방문 때엔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약속했다.

 

김연자 북한김연자 북한공연
김연자 김정일김연자 북한공연 무대

 

2002년 두 번째 방북.

4월 6일 4.25문화회관(6,000명수용)에서 콘서트.

4월 8일 봉화예술극장(2,000명수용)에서 콘서트.

4월 10일 만수대 예술극장(국립영빈관극장)에서 콘서트.

김연자는 '반갑습니다’(북한가요)로 공연을 시작해, 여러 곡의 민요와 민요풍의 노래를 불렀다. 김정일은 김연자 일행과 만찬을 함께 했으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용순 조선로동당 대남비서 등 고위간부들이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북한에서 공연은 2002년 4월 10일에 방송되었다.

"작년에는 우리 노래 18곡과 북한 노래 7곡을 합쳐 25곡을 불렀다. 올해 김정일이 처음으로 6곡을 신청했다." 김연자가 신청곡을 모두 기억하지 못해 센슈(千秋) 기획에 확인하니 '준마처녀' '사랑하시라' '처녀시절' '강성부흥 아리랑' '아직은 말 못해' '뻐꾸기' 등 북한 가요 6곡이었다. 센슈기획은 북한 요청으로 이들을 북한의 전자악기단에 맞게 편곡했다.

"북한 주민 10만 여명이 만드는 집체극 '아리랑' 리허설을 관람한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객석에는 저를 포함해 불과 30여명밖에 없었거든요." 김정일은 공연비용을 김연자 측이 부담하는 줄 몰랐다. 자선공연이었음을 알게 된 김정일이 김연자 일행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양만이 아닌 지방에도 공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2002년에 지방공연 제의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으나, 2001년 공연 후에 김연자가 2002년엔 지방 순회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지방 공연제의는 2001년부터 받았을 수도 있다.) "4월 말고 여름 좋으니 다음엔 여름에 와서 몇 군데 다니며 좀 오래 있어라." 2003년 한달간의 북한 지방 도시 순회 공연을 계획했는데 일본인 납치 사건이 터져, 계획을 취소했다. "김 위원장이 계속 북한 공연을 오라고 했는데 일본 내 반북 감정이 심해 항의도 많이 오고 두 차례 공연 때문에 '북한 가수'처럼 소문이 나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NHK 나가면 왜 북한 가수 내보내냐고 하더라고 한다."

북한에서 김연자가 앉은 자리가 김대중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였다고 한다. 어떤 북한 간부는 김연자 공연표를 잔뜩 사서 암표로 10배 비싸게 팔았다고 한다. 강철환 유튜브 김연자가 북한에서 만든 한복을 입고 김정일을 만나서 "평양에서 만든 한복이다"고 말하니 김정일이 "밉다. 남한 한복이 훨씬 이쁘다. 우리보다 남조선이 더 잘 만들죠" 김정일의 혈액형을 질문하니 분위기가 싸해졌고, 다른 간부들이 기밀이랬으나, 김정일이 A형이라면서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았다고 대답했다. 북한은 공연할 가사를 사전심의 했고 3명 정도가 리허설을 봤다. <아침의 나라에서> 가사에서 "서울 korea"를 빼래서 "korea korea"로 불렀다.

 

 

2002년 ~

이 시기 인터뷰에서 김연자 왈 :

"일본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요. 일본은 어디까지나 '단체사회'라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한답니다."

"히트곡이 별로 없어요" "남의 노래도 많이 불렀어요" "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갔을 뿐이에요"

 

2002년 FIFA 월드컵 찬가였던 '愛☆アリガトウ (사랑☆고마워)'.

2002년 11월 21일 <北の雪?(북의 눈벌레>싱글 발매. 오리콘 엔카 차트 5주(다른 기록과 달라 불분명) 연속 1위

2006년 프랑스 파리 공연 계획했으나 취소되었고, 200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했다.

2008년 8월 2일 or 6일 '夜明け前(동트기 전)'싱글 발매. 오리콘 엔카 차트 3주 연속 1위.

 

김연자 무대 드레스김연자 일본 엔카

 

일본에서 새 싱글 발표로 한창 활동 중, 8월 8일 급성 간암으로 아버지가 사망했다.

스케줄로 바쁠 김연자에게 어머니가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10일 후에야 공연 후 회식 때 지인의 전화로 부고를 들었다. 향수병과 마지막엔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꿈과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자주 뵙기 위해 한국 활동 재개를 결심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면 일단 한국에 와 있는 동 안이라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잖아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느꼈어요. 음반을 내고 한창 바쁠 때였는데 열흘 뒤에야 임종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흔들릴까 봐 큰 공연부터 무사히 마치라고 알 리지 않으셨대요. 그 얘기를 듣고 수화기를 붙잡은 채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일본 연예계는 엄격해 스케줄을 펑크 내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 당시 그녀가 스케줄을 취소하려면 약 100억 원 이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돈 때문에 일본에 갔지만 결국 돈 때문에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장녀로서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갚기 위해 그녀는 한국 활동을 결심했다. 떠나보내고 난 후에 그리워하느니, 지금부터라도 가족의 정을 더 느끼고픈 마음에서다. 그러나 아직은 아예 한국에 정착할 계획은 없다. 그간 일본에서 활동해 온 세월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 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할 예정이다.

“일본 생활은 정말 바빠요. 새 음반이 나올 때 마다 신인처럼 뛰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20여 년을 그렇게 노래만 부르며 살아왔지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하고 싶어요. 목소리가 허락하는 한 노래를 부르고 남은 생은 우리나라에서 보낼 거예요. 제가 뼈를 묻을 곳은 한국이죠. 귀화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국에서 자신의 1980년대 인기가 그대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김연자는 한국에 와서 달라진 상황을 깨닫고 신인의 마음으로 해야되겠구나 생각했다. 한국어도 잘 기억이 안 나서 "에… 또"만 반복했다.

2009년 12월, 22년만에 한국에서 신곡 <10분 내로> 발표. 한국 성인가요계에서도 여전히 죽지 않은 김연자 파워를 보여주며 성공했다. 이후 이 곡은 일본 콘서트에서도 한국어로 불러지면서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됐다.

 

 

2012년 5월, 10년전부터 갈등을 느끼던 남편과 이혼했다.

김연자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 일본에 무일푼으로 간 김연자는 빚이 있는 남편에게 돈 관리를 맡겼고, 그게 쭉 이어져서 김연자는 활동에 필요한 돈을 남편에게 매번 타서 쓰기만 했다. 지방 공연에 가면 경비로 20만엔을 주는 식이었다. 남편은 "가수는 노래만 하면 된다"며 김연자에게 출연료나 직원 월급 등을 한번도 안 알려줬다. 그녀는 쉬는 날이 드물게 매일 일했고 가수로서 성공했지만, 그녀가 속한 회사의 사장이자 돈 관리를 전담했던 남편은 돈 없다며 김연자에게 돈 주기를 꺼려 했다. "남편에게 월급을 달라며 직접적으로 호소해 보기도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래도 남편이 돈을 모아놓고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거라 기대했던 김연자는 남편이 모은 돈이 없대서 충격 받는다. 김연자는 가수 활동으로 번 돈을 1400억원(매출이겠지만)으로 추산했지만, 남편이 돈 없대서 이혼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전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이 모두 빼돌린 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김연자 회사의 30명 정도가 그녀의 활동으로 먹고 사는 구조였다. (악단을 안 쓰고 MR을 쓰면 돈을 많이 모았을 텐데..남편은 지휘자이자 악단장 출신) 게다가 김연자는 옷을 좋아해서 옷을 많이 사 입는데 특히 김연자의 무대 의상은 모두 맞춤 제작으로서 한 벌에 수백만원 이상인데 겨우 몇 번만 입는다. 실제로 남편은 그동안 번 돈 모두 가수활동에 쓰였다고 말했다. 김연자는 친동생에게 동생의 회사 월급 정도 되는 용돈을 항상 줬다고 한다. 그러니 김연자가 돈을 전혀 못 받고 못 쓰고 노예마냥 산 것은 아니다. 매출에서 50명의 직원들 월급과 다른 활동 비용과 거액의 옷 값 등을 제하면 남편이 천문학적 금액을 착취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혼하자 남편은 김연자가 일본 활동을 접는다는 거짓말을 김연자의 팬들에게 이메일로 공지하는 찌질한 짓을 했다.

우울해 매일 울던 김연자에게 동생이 한국에 오라고 말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연자가 한국에 와서 살려고 결심했을 땐 돈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에 진출하기 전에 한국에 사둔 집과 건물이 있었다.

2012년에 YJK COMPANY를 설립했다.

 

김연자 아모르파티 성공김연자 아모르파티 역주행

 

김연자 아모르파티

김연자는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좋아한 까닭에 작곡가 윤일상을 소개 받는다. 윤일상이 "누나 어떤 노래 하고 싶어?"고 묻자, 김연자가 그동안 불러왔던 노래 주제들과 다르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고 싶어 "내 인생의 찬가"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윤일상이 만들어 줬다. MR을 받은 김연자는 발라드풍의 음악을 예상했는데 생소한 EDM에 놀라고 감을 못 잡아 헤맸다고 한다. 노래할 타이밍을 분간할 수 없고 못 부르겠다고 윤일상에게 전화하여 가이드 보컬 녹음본을 받고서야 녹음했다. 엇박이 많아 연습 때도 어려웠는데 녹음 후에도 어려워서, 옆에서 잡음이 방해하면 틀린다고 한다. 지금도 무대에서 손으로 마디를 세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 라이브 때 많이 틀렸다.

처음 제목은 ‘연자송’이었다”며 “이는 내 인생을 그린 곡이었기 때문”이라 밝혔다. 운명을 사랑하라(독일 철학자 니체)’는 뜻의 ‘아모르파티(amor fati)’라는 제목을 달아준 사람은 신철 프로듀서다. 이건우 작사.

"원래 '아모르파티'에 랩 피처링이 들어가려고 했죠. 근데 제안했던 분이 거절하면서 지금처럼 심플하게 나왔어요. 유명한 베테랑 남자고 현역이라기보다 선생님에 가까운 분이에요. 팩트는 그분이 절 찼다는 것.(웃음) 지금 버전이 좋아서 만족해요."

2013년 3월 27일 <채널 A 분노왕> 방송에서 EDM과 트로트를 결합한 '아모르파티'가 최초로 공개됐다. 인터넷에 기재된 앨범 발매일은 7월 23일이다. 보통 신곡 앨범을 발매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신곡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방송이나 콘서트에서 먼저 부르는 경우도 알게 모르게 있는데. 아모르파티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듯 하다. 

"숨 차다", "어디까지 1절이냐?" 등 중장년층이 어려워하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노래를 불러도 별 반응이 없어 '이 노래는 꽝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은 좋아했는데 트로트 팬들이 "이 노래 못한다, 접어라" 등의 말을 했다고도 한다. MBC 박준형, 정경미의 2시만세 자신도 가사 외우기도 어려워 성인가요에 안 맞다고 판단해 이 노래 부르기를 멈췄다. 대신 ‘밤열차’, ‘쟁이쟁이’를 밀었다.

2014년 김연자 왈 "국내에서 김연자는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틀을 깨고 싶어서 '아모르파티'를 불렀는데 오히려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역주행 경위

2016년 KBS 열린음악회(2016년 7월 10일 방영) PD가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김연자는 아모르파티를 익숙해지기 전에 빨리 포기했기에 가사도 잊어버린 상황이라 처음엔 거절하였지만 PD가 꼭 불러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EXO 다음 순서로 출연했다. 알고 보니 ‘왜 이 좋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의아했다더라.

윤일상이 엑소 무대 끝나고 나가지 못한 채 앉아 있던 엑소 팬들이 아모르파티를 보고서 바로 sns에 팬캠과 추천글을 올려 소문냈다고 말했고, 그걸 들은 김연자가 언론에 말하여 그렇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윤일상의 잘못된 추측이고, 그런 경위와 다르게 이 공연 영상을 본 사람이 인터넷에 소문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정작 열린 음악회에 엑소와 김연자가 함께 출연한 2016년에 계속 잠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17년 3월이 되어서야 <아모르파티>를 추천하는 트윗이 등장했다. 이 추천글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며 인터넷 여기저기 퍼지면서 알려졌다. 이 시기에 이를 통해 아모르파티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노래를 처음 접한 반응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엔 <아모르파티>을 추천글이 올라와 반향을 일으킨 적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트위터는 엑소의 팬일 수도 있으나 그렇더라도 적어도 열린음악회 현장에 엑소 때문에 앉아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보게 됐다는 설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트윗엔 관중이 찍은 "아모르파티"가 아닌 kbs 방송 영상이 링크됐다. 고로 공연 때 바로 팬캠이나 추천글을 올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후일 유튜브하다가 <아모르파티>를 보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상 "열린음악회 녹화 현장 엑소팬의 즉석 입소문에 의한 역주행설"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김연자 역주행김연자 아모르파티 무대

 

아모르 파티 대히트 이후

어쨌든 역주행한 아모르 파티의 대박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김연자는 제 5의 전성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연자의 히트곡으로 수은등보다 아모르 파티가 먼저 떠오르거나, 김연자는 잘 몰라도 아모르 파티는 아는 사람들도 많다. 초딩들도 "아모르 누나" 라고 부르면서 알아보는 등 트로트계를 초월한 전국적 인기를 누리게 됐다.

2017년 5월 27일에 방영된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더욱 인기가 많아졌다. 지상파 3사를 포함해 여러 주요 tv 쇼에 출연하며 방송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떠올랐다. 대기실에서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며 큰 어른의 풍모도 과시한다. 현역 아이돌들의 나이가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젊은 할머니 뻘인 셈이다.

부산대의 섭외로 가수 경력 처음으로 대학 축제 무대에 섰다. 부산대에서의 공연은 반응이 좋아 유튜브 조회수도 높게 나왔고, 다른 대학에서도 섭외가 많이 들어왔고, 뉴스로도 나갔다. 이에 김연자는 9월 서울 핸드볼경기장에서 '떼창' 노래경연(tvN 300)에 부산대 학생 150명을 초청했고, 부산대 학생들은 버스 3대로 상경해 아모르파티를 떼창으로 불러 상대 가수를 이기는 등 2차례나 서울로 올라가 출연했다.

부산대 총학생회가 가을축제 '시월제'를 개최한다고 하자 김연자가 감사의 뜻으로 부산대 재방문하여 무료공연과 장학금 지급을 했다. 2018년 12월 28일에 열렸던 KBS 가요대축제의 엔딩 공연에 아모르파티로 등장했다. 방탄소년단, 엑소, 트와이스 등의 세계구급으로 유명한 아이돌들이 백업 댄서 역할을 자처하며 모든 출연자들이 이를 즐기며 가요대축제에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었다. 불후의 명곡 400회 일본 특집의 1부인 399회(2019.04.20. 방송)에서 전설로 출연했으며 트롯 전국체전에 글로벌 팀 감독으로 출연했다. 유명가수전에 출연했다.

후에 탈모르 파티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선거송으로 사용하였다.

 

 

김연자 전 남편

전 남편은 재일교포 2세 김호식(일본명: 오카 히로시), 지휘자 겸 앨범 프로듀서, 김연자의 매니저이자 소속사 사장,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악단장. 예총 일본지부장. 김연자와 18세 차이며, ''김연자의 어머니와 2살 차이, 아버지와 7살 차이'다.

김연자가 처음으로 일본에 데뷔했을 때 악단장으로 온 그와 만났고 첫눈에 서로 끌렸다. 김연자가 한국에 돌아온 후 장거리 연애와 일본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한다. 결혼 후 일본 갈 비자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음반이 대박나서 일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다.

 

김연자 전남편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에서의 성공에 공을 세웠다. 남편은 고교시절부터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해 가요계 지인들이 많았고 남편 때문에 김연자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를 맡아 그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했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다정하게 저를 이끌어줬죠. 남편이 없었으면 일본의 김연자도 없었어요.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싸울 때 남편이 김연자에게 "나 없었으면 너 호스티스나 하고 살았을 것"이라 말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김연자의 남편이 야쿠자라는 소문이 한국에 있었지만, 남편 본인은 그런 소문을 몰랐으며 야쿠자임을 부정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다. 남편은 가수 일이 아이라며 음악만 하길 원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질만한 여유가 생기나 싶으면 가수로서 큰 일이 와서 번번이 임신의 기회를 놓쳤다. 아이에 신경 쓸 시간도 없었고 김연자가 가수라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마흔 네 살이 되자 체념하게 됐다.

"노래를 하다 보니 자식 가질 기회를 놓쳤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제게는 평생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바로 노래죠."

김호식: "아내는 가수이다. 가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거다. 그래서 그것만 생각하는 편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가엽기도 하지만 이미 가수의 길을 택했으니 어쩔 수 없다."

김연자: "남편이 나를 잘 봤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이가 있으면 아이에게 집중하지 노래를 못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두가지 일을 못한다. 내가 여자로서는 불행하지만 가수니까 그게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후회는 없는데, (아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 나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다. 남편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 나한테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자식까지 키울 여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자식이 없다 보니 서로 할 수 있는 대화가 음악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없어지더라. 우리 부부생활의 중심은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끝났다. 난 아내로서 사랑도 못 받았다. 항상 외로웠다. 노래가 아니었다면 진작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다.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한다. 내 동의 없이 일본 활동 중지 편지를 보낸 것이 가장 배신이고 충격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내 팬에게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다. 내가 노래 하나로 여태 살아왔는데 그 숨을 끊으려고 하다니 정말 원망스럽다. 내 인생이 정말 불쌍하다."

김연자는 2011년 SBS '자기야' 방송에서 결혼 생활을 고백했다.

"사실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몇 천번 한 적이 있다. 일본에선 저한테 남편밖에 없고 오로지 나 혼자다. 힘들어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이혼하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때마다 이혼을 안해줬는데 , 어느 날 갑자기 가라고 하더라.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던 남편이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나를 보내주겠다고 나섰다. 그게 반대로 더 슬프고 버림받는 기분이었다. 쫓겨나는 기분이고 더욱 섭섭하게 느껴졌는데, 그제야 남편이 내게 큰 버팀목이었음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남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2012년 2월 그는 남편과 이혼 조정을 신청했고, 5월 이혼했다 위자료를 한푼도 받지 못했다는 폭탄 고백을 했다. 이혼 사유는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 그간의 돈벌이는 남편이 관리했는데, 김연자 말로는, 남편이 돈이 없대서 위자료와 재산 분할을 전혀 못 받았다.

남편이 빼돌려 돈을 숨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회사 관계자도 돈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회사에 소속된 수십명의 악단과 직원을 먹여살리는 문제와 몇번밖에 안 입고 매번 맞추는 엄청난 고가의 무대 의상 등 비용도 컸을 것이다. 김연자도 동생을 만날 때마다 동생의 월급만큼 용돈을 주는 등 돈을 전혀 못 쓰고 산 것도 아니다.

 

김연자 무대홛동김연자 가수활동

 

김연자 여담 일화

일본에서 열리는 콘서트나 TV 프로그램에 한복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들의 표적이 되어 많은 협박과 핍박을 받았다. 일본 활동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많이 받았지만, 오로지 실력 하나로 모든 것을 제압한 것이다. 물론 한복은 지금까지도 디너쇼에서 계속 입고 있다. 그녀가 입는 한복은 특수 제작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다. 한국의 기개를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더 화려하고 큰 자수가 박힌 한복을 입는다고 한다. 요즘은 한류가 커서 자기가 굳이 한복을 입어 한국을 알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특유의 블루투스 창법의 경우에는 김연자의 성량이 워낙에 크기에 만들어진 창법으로, 정엽의 맷돌 창법과는 차이가 있다.

고령임에도 성량이 커서 마이크를 멀리 떼고 불러도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야외 현장 스피커에선 소리가 적은 걸로 의심되는 정황도 있어 후보정 덕에 소리 크기가 유지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매우 큰 성량과 때로 과격하게까지 느껴지는 강한 감정선 등, 일본의 국민 정서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가수였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계속 갈고 닦아 긴 무명 시간을 이겨 내고 일본의 국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2012년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해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서 Staff가 뽑은 1위에 꼽혔다. 다른 가수들이 모두 퓨전적이고 세련된 편곡을 한 것에 반해서 김연자는 그야말로 정통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줬다. 김연자 특유의 폭풍 가창력과 뒷부분의 애절한 내레이션까지 최근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나는 가수다의 무대를 관광 보낸다는 평가까지 받았으며, 1위를 기록한 문주란 이상까지 간다는 호평을 얻었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죠(웃음). 한국가수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고 있어요. 한국인임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공연을 할 때 마다 한복 한 벌씩을 입어요. 하지만 향수병은 오래전 이야기죠. 저랑 함께 일하는 스태프만 50명이에요. 외로울 틈도 힘들 틈도 없어요. 지금처럼 엔화가 비쌀 때 일본에서 더 열심히 벌어서 한국에 투자도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해 야죠. 예쁘게 봐주세요" 일본에서 음반이 잘 되지 않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크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된 만큼 끝까지 멋지게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녀는 기회가 된다면 꼭 한국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목포에 있는 고아원인 '공생원'에 '사랑의 음악당'을 건설하기 위해서 자선 콘서트를 한일 양국에서 50회를 열었고, 2011년 대지진 당시에는 도전 1000곡의 우승 상금을 모두 기부했다.

씨름판에서 유명한 "천하장사 만만세~"를 부른 가수다. 곡명은 천하장사로 1986년에 발표했다. 또한 1988 서울 올림픽 찬가 '아침의 나라에서' 역시도 그녀의 노래인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본래 '아침의 나라에서'는 국민 투표를 통해서 서울 올림픽 주제가로 낙점됐는데 그 뒤에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서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로 교체됐다. 이 어른의 사정이 웃는게, 국민 투표로 이 곡이 당선된 뒤부터 '촌스럽다', '세계인들이 들을 노래인데 너무 뽕짝스럽다'는 이유로 신문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뒤에 의뢰되어 만들어진 곡이 당시에 한국에서 듣보잡이였던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였다. 김연자의 곡도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곡이기는 하지만, 손에 손잡고가 넘사벽 수준으로 훌륭해서 묻혔다.

 

김연자 젊은시절 활동김연자 리즈시절 화보

 

KBS 전국노래자랑과 NHK 노래자랑에 가끔씩 초대 가수로 나온다.

프로듀스 101 시즌2와 쇼미더머니6을 봤다고 했으며 김사무엘을 응원했다고 한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일본어로 커버한 것도 유명하다.

2005년 01 「김연자 김치」전국 유명 식료품점에서 발매 개시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유재석의 팬이라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 반가웠다고 했으며, 해피투게더에서도 만나서 팬이라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박명수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방배동 이웃 주민인 인연과 EDM으로 통하는게 있었고 박명수가 엄청 챙겼다고 했다.

2018년 부산대 축제에 참가 소식이 있었을 당시의 반응은 이구동성으로 이게 대학교 축제인지 어르신 축제인지 모르겠다, 학생회장 토토했냐?라는 혹평이 많았지만, 막상 축제에서 여러분으로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줬고, 아모르 파티를 부르니까 난리났다.  이에 따라서 다른 문제와는 별개로 축제 뒤로부터 섭외 가수에 대한 불만은 일축 되었다. 그리고 2018년 부산대 시월제 축제에 우정 출연으로 다시 방문했다. 

2001년 방북 때 김정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며, 개런티에 대해서 합의 없이 왔기 때문에 그냥 자선 공연인 셈 치려 했다. 하지만 환영 만찬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김정일이 "자선 공연은 절대 하지 마거라. 그게 우리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다른 외국 가수들도 돈 받고 오는데 왜 자선 공연을 하려 하느냐?"면서 직접 돈이 든 서류봉투를 건넸다고. 한편으로는 김정일과 만난 김에 혈액형이 뭔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주변의 간부들이 그런 민감한 생체 정보는 기밀 사항이라면서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김정일이 말리고는 "내 혈액형은 A형이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는 답변을 흔쾌히 했었다.

가사를 자주 잊어버린다고 한다.

2020년 8월 7일 히든 싱어 6에서 1번째 원조 가수로 출연했다.

2020년 10월 11일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박현빈 가족의 게스트로 출연했다.

외가 식구들이 노래는 잘 하는데 박자는 못 맞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음치.

그는 일본에서 성공한 비결로 `서비스 정신`을 꼽았다. 팬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는 편이다. 함께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닌다.

사할린, 상파울루 등 해외 각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귀화를 요청하는 일본 팬들도 많았지만 김연자는 원치 않았다.

일본에서 역시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하여 김치를 판매하는 등 한국과 관련된 활동도 많이 하고 있다.

망토를 잡고 도는 동작은 원래 계획된 안무가 아니라 그냥 신나서 하다 보니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2017년 하반기 이후로 단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데 숱이 워낙 많다보니 가발로 추정된다.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개명을 여러 번 고려했었다. 작사가가 만든 이름이 "김현아", 일본에 처음 갔을 땐 "매매중" 작명했지만 쓰지 않고 본명만 썼다. 김연자의 일본어 표기는 キム・ヨンジャ 다.

고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1937~2000)는 김씨 공연에 축전을 띄우고 꽃다발을 보내는 열혈팬이었다.

노래는 작곡가나 작사가 등 전문가에게 다 맡긴다. 겸손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릴 땐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잘나서 인기 있는 줄 알았다. 노래도 내가 좋아한 곡을 골랐다. 하지만 히트곡 근처에도 못 갔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우리는 유행을 잘 파악 못한다. 캐치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 변화를 챙기는 안테나를 많이 세운 작곡가나 작사가다.

김연자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고추장과 와사비의 조합이라는 비유를 쓴다. 일본 가수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한국 가수의 힘있는 목소리 등을 다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오리콘 엔카 차트 15곡 1위를 했다.

세계 20개국 공연

한국 방문의 해 명예홍보 대사

브라질 명예국민

1990년대 히트작인 병맛 코믹 만화 이나중 탁구부에서 주인공 일당이 여자 탈의실에 침투할 때 암호로 사용하는 행동개시 신호를 뜬금없이 "김" "연" "자" 라고 한다. 국내 정발본에서는 설운도라고 번역되었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김연자가 일본 활동에 주력하느라 젊은층은 김연자를 잘 몰랐기 때문. 역설적으로 당시 일본 내 김연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21년 3월 8일 방영된 '강호동의 밥심'에 출연해 11년째 연애중이면서 2013년부터 8년 가량 동거중인 남자친구에 대해 언급했다. 연인은 현재 소속사 대표로 초등학교 4학년때 음악학원에서 만나 알고 지낸지 50년됐으며 힘들었던 시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결혼까지 가는 것이 시간이 걸려서 하고는 싶은데 자꾸 미루게 된다. 올해는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결혼을 할까 한다"며 남자친구는 봄에 하자고 하는데 나는 많은 분께 축복을 받고 싶어서 가을쯤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2021년 8월 21일 놀면 뭐하니?에 잠시 출연하여 아침의 나라에서를 열창했다.

전참시에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것이 자주 확인되었다. 모자이크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꿈의 정원으로 보인다.

드레스룸만 15억이 넘는다고 한다. 

2021년 9월 서울 은평구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2021년 10월 19일 광주 AI 페퍼스의 개막전이 열린 페퍼스타디움(염주체육관)에서 신곡 무조건 광주로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어 11월 3일에 광주시청 접견실에서 이용섭 시장으로부터 기념품 민주의 종을 받았다.

2022년 4월 30일 놀면 뭐하니?에 WSG 워너비에 참가자로 출연하여 임재범의 너를 위해와 이승철의 잊었니를 열창해서 대호평을 받았지만 "너무 거장이라 신인 발굴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차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3개의 소속사 중 2개의 탈락을 받아 탈락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에 출마한 서울 은평구청장 김미경 후보 지원 유세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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