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임창용 프로필 나이 데뷔 선수경력 학력 상습도박 사생활 논란
임창용
林昌勇 | Chang-Yong Lim
출생
1976년 6월 30일 (46세)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까치마을
본관
나주 임씨
국적
대한민국
신체
182cm, 80kg, O형
가족
아버지 임영치(1940.7.28~2016.10.17), 어머니, 3남 2녀 중 넷째
배우자, 슬하 2남
학력
광주대성초 - 진흥중 - 진흥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우타
프로 입단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 팀
해태 타이거즈 (1995~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8~2012)
시카고 컵스 (2013)
삼성 라이온즈 (2014~2015)
KIA 타이거즈 (2016~2018)
병역
예술체육요원
종교
불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前 KIA 타이거즈 출신 우완 사이드암 투수.
현역 시절 해태-기아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카고 컵스에서 활약하면서 세이브 기록으로 성구회에 가입한 최초의 투수이다.
대표적인 별명은 '창용불패'와 '애니콜'이였다. 또한 한국인 투수 중에서 24년 연속으로 1군 리그에서 투구한 것은 임창용이 유일하며, 통산 1,004경기 등판 기록은 모든 동양인 투수 중 역대 1위에 해당한다.
다만 사생활면에서는 잡음이 많았고, 말년에 삼성과 기아에서 모두 방출되면서 은퇴식도 갖지 못한 채 은퇴했다.
임창용 평가
"나는 밖에 나오면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사회생활은 잘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야구장에 있는 동안은 프로선수로서 부끄럽지 않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임창용 선수의 본인 평가
비록 사생활이 엉망이었던 탓에 저평가받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투수임은 자명하다. 1996년~1999년까지 100이닝+를 소화해왔고, 마무리 투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97년 이래 세이브 순위에 늘 꾸준히 들어왔다. 오승환 등장 전까지 KBO 최연소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으며, 98년에는 1점대 ERA도 찍었고 99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ERA 1위를 찍지 않나, 주전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하더니 1선발로 등극하는 등... 여튼 대단하고 놀라운 기록들을 많이 세우기도 했거니와, 일본 시절 전까지 전성기 대부분이 혹사로 점철되어 있는데도, 그 구속을 유지했다는 건 놀라움을 넘어 무섭기 그지없다. 토미 존 서저리를 받긴 했지만, 여튼 매우 출중하다고 볼 수 있는 선수이다.
의외로 마무리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로의 능력도 대단한 투수다. 전성기 적이었던 2001년~2003년 잠깐 고정선발로 뛰었던 당시 삼성의 토종 1선발 자리를 꿰찼다는 것과, 선발 로테이션제가 확립된 2000년대 야구에서 달성하기 어려워진 200이닝+를 달성했다는 것, 선수 생활 말년에 선발로 떠밀렸는데도 버텨서 일정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커리어 대부분을 마무리 대신 고정선발로 뛰었어도 300세이브에 필적하는 대기록을 수립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의 투수. 어쩌면 고정선발은 혹사가 덜한 편이니 커리어 대부분이 고정선발이었다면 마무리 300세이브 이상의 대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다. 우완 역대 최다승이라든가...
선수 초중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도 오랫동안 활동 했었으며, 고무적인 것은 2016년 기준 커리어 22년차인 노장인데도 140~150Km을 넘나드는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30대 중반에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 타자에 비해 투수의 수명이 짧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놀랍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특이한 자기 트레이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2001년~2003년은 선발로도 뛰었었다.
실상 마무리로는 3년 연속 130이닝을, 선발로는 200이닝까지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레전드급 혹사의 아이콘이다.
다만 커리어에 비해서는 상운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기 때 두 부문에서 경쟁을 하다가 한 부문 빼고 꼭 경쟁자에게 밀리거나, 한 부문에서 경쟁하다 아예 밀려버리곤 했다. 게다가 큰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여 포스트시즌 경력은 많은데 MVP 한 번 수상한 적이 없다.
그의 속구는 뱀직구라 불리며, 속구를 던지면 심한 테일링이 걸리면서 공이 뱀 같이 들어온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제구까지 되니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덕에 전성기 때는 오승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9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리던 진필중에 대적했던 유일한 마무리 투수였기도 하다. 다만 전성기 중무리 활동과 선발 전향으로 인해 세이브 수에서 꽤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정도이면 그의 자신감과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발도 빨라 대주자로의 가치도 있는 선수이다.
국내 투수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암의 전설로 통한다. 이는 많은 사이드암 투수들이 임창용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잘하면 제2, 제3의 임창용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원판 임창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단점으로 지적되는 건 큰 경기에서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 분명 해태 시절까지만 해도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중 무려 3세이브를 거두는 등 제 몫 이상은 하는 선수였으나 1999년 삼성에 넘어간 이후부터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친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99년 플레이오프 당시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에서 탈탈 털렸던 게 트라우마였는지 일본 진출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시즌 때보다도 못한다고 욕을 들어먹곤 했으며 국대도 차출은 많이 되었으나 활약상이 그리 크진 않았다.
경기 외적으로 흠이 있다면 신인 때부터 사생활 관리에 약점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해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이 임창용의 사생활을 고치기 위해 한 달을 같이 먹고자며 훈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임창용이 머리 염색을 했던 것을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당시 2군에 있던 이순철 등의 고참들에게 원상복구를 부탁하는 등, 사생활 문제를 고치진 못했다. 2003년 급기야 간통사건을 저질렀고, 2015년 큰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외로 행운아 기질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터뜨리고 쫓겨난 게 큰 행운이 되어 여론의 호전과 함께 고향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 2013년 미국 진출 당시 소속팀 시카고 컵스의 리빌딩에 힘입은 빠른 승격과, 최종적으로 자리가 나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수 있었던 것을 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임창용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임창용 투구 스타일
대한민국 토종 투수들 중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구속과 구위를 자랑했던 파이어볼러. 구위가 정점이었던 야쿠르트 시절엔 평균 구속 150km/h대 중반, 최고 구속 16
0km/h를 무려 사이드암으로 던졌으며, 특유의 무브먼트로 인하여 그의 패스트볼은 일명 뱀직구로 불렸다. 게다가 나이가 40세를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최고 152km/h의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이는 KBO에서 유일무이한 퍼포먼스이다.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강속구를 던진다고 알려져있으나 임창용이 던지는 강속구는 팔이 로우 쓰리쿼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심지어 로우 쓰리쿼터를 넘어 하이 쓰리쿼터로도 종종 던진다. 이 투구폼의 궤적과 빠른 강속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명 뱀직구는 임창용의 대표적인 전매특허 구질이다. 이 공을 처음 본 일본, 특히 2ch 사람들은 '이건 뭐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냐?'라고 말할 정도.
다만 전성기 때 임창용 투구폼은 공이 언더핸드 경계선에서 릴리즈될 정도로 낮았는데, 그럼에도 140~150km/h의 속구가 나왔다. 그러나 2003년 즈음부터 그간 혹사의 대가였는지 기존 폼에서의 구속이 감퇴하기 시작, 시즌 초 고전하다가 우연히 팔각도를 올려 던진 게 주효하여 이후 팔각도를 좀 더 들어올려 던지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임창용은 구속 증가의 효과를 보았지만, 공의 변화가 그만큼 약해지면서 2004년 이후 일본 진출 전까지 부진했던 하나의 원인이 되고 만다.
임창용의 전매특허 뱀직구. 패스트볼인데 궤적이 휘는 것이 포인트. 야구의 구질 항목에 나오듯 원래 직구라도 회전축이 조금은 틀어질수 있는 만큼, 완전히 똑바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임창용의 경우 일반적인 속구에 비해 수직 무브먼트가 적고 수평 무브먼트가, 그것도 좌우로 휘며, 그 정도도 눈에 띄게 크다는 특징이 있다. 즉, 던질때 기준, 수직회전 효율이 다른 사이드암 투수들보다 훨씬 좋았다는 얘기. 지금도 사이드암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갔다.
패스트볼이 주력인 거의 원피치형 투수로, 그 외로 던지는 변화구는 슬라이더를 주로 던진다. 그 외에도 싱커나 스플리터, 커브 등 있을 건 있다. 슬라이더는 좋은 편이지만 최고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까지는 아니고, 싱커나 스플리터는 괜찮은 편이며 커브의 경우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국내 복귀 이후로는 나이가 많아져서 생기는 구속 감소 때문인지 변화구 구사율이 갈수록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주력 구종은 패스트볼이다. 뱀직구 때문인지 몇몇 이들은 투심도 구사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2018 시즌을 앞두고는 아예 오랜만에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커브와 투심, 체인지업까지 장착했다고 밝혔다. 커브의 경우 두 가지 폼을 사용하면서 존 안으로 넣어 루킹 삼진을, 바깥으로 보내 헛스윙 카운트를 버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투심과 체인지업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보아 구속 저하를 대비해 범타 처리를 늘리려는 듯 하다.
국내에서는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뛰었기 때문에 공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한 프런트나 감독과의 불화설도 종종 보도되었고, 개인 사생활 측면에서도 물의를 빚는 등 야구 내외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일본 진출 직후 '모든 것을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그 말 속에 일본에서의 호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담으로 도는 얘기로 2005년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실은 이게 부상 치료용 수술이 아니라 신체 강화 수술이 아니였냐는 소리도 있다. 이 당시에 배영수의 10km/h를 훔쳐갔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배영수는 같은 수술을 받은 뒤 시속 150km/h에 육박하던 속구 구속이 10km/h 이상 떨어져 긴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배영수가 1년 늦게 수술했으므로 도둑질이란 건 농담. 하지만 배영수가 재활 뒤 복귀한 2008년에 좀 모자란 듯한 성적을 낸 반면 같은 해 임창용은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다시 태어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2009년에는 배영수가 패스트볼 구속이 135도 못 넘을 정도로 아예 충격적으로 몰락한 반면 임창용은 160km/h를 찍는 등 날아다녀 대비되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문가들은 임창용이 40대의 나이에도 150km/h를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려대는 비결을 유연성으로 보고 있다. 투구 시 테이크 백, 스트라이드, 릴리즈 까지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데다가 유연성이 뛰어나 젊은 투수들 보다도 더 많이 뒤로 젖혀지고 스트라이드 동작의 폭이 크기 때문에 공이 많은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에 가뜩이나 횡방향의 회전이 많이 실리는 사이드암 스로(Side-arm throw)인 것에 더해 더 많은 회전을 추가해 뱀처럼 휘어들어가는 뱀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칭과 런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웨이트를 하더라도 하체쪽에만 집중할뿐 상체쪽에는 크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웨이트로 인해 과도하게 근육이 붙어버리면 유연성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임창용은 오버핸드 투수도 아닌 옆구리의 사용비중이 높은 사이드암 스로기에 그 영향은 더욱 더 크다.
행적에서 보듯 비범한 멘탈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신력 역시 강한편이다. 심지어는 주자있는 승부처에서도 신 구종테스트하는 기행도 종종 있었을 정도. 정신력이 강하기에 승부를 피하지 않고, 스트라이크존에 압도적인 포심을 쑤셔넣는 것에 가려져서 그렇지. 커맨드 자체는 커리어 대부분 동안 평균 이하 ~ 딱 평균 수준이었다. 최전성기 평가를 듣는 일본시절 4자범퇴 드립이 나왔던것도 압도적인 투구내용을 보여주는 중에도 심심하면 볼넷을 한두개씩 주거나, 가운데로 쑤셔박다가 단타를 얻어맞았기 때문. 특정 코스를 노리는 제구력을 지닌 투수하곤 거리가 멀었다. 대신, 엄청나게 강력한 정신력으로 어떤 때든 스트라이크존 근처에는 쑤셔넣을 수 있을 정도는 됐으며 그 포심이 대놓고 가운데로 들어온다는걸 알아도 그걸 공략하지 못하는 타자들이 수두룩했다. 이 때문에 과거 부상 여파, 노쇠화로 패스트볼 구위가 하락했을때 난타를 당하기도 했다. 기아에서 맞이한 말년이 되어서야 이 커맨드 능력이 좋아졌다.
단점으로는, 스트라이드가 크고 사이드암 투구폼으로 인해 도루저지가 약한 편이며 데뷔한지 오래된 투수답게 인터벌이 엄청나다. 거의 25초가 넘어가는 인터벌을 지니고 있어서 경기 진행이 느린 편. 투구 시간 제한이 없던 옛날 투수들, 한구한구 집중이 필요한 불펜투수들이 인터벌이 느린 경향이 있는데 임창용은 둘 다 해당한다. 컵스 데뷔전 보면 5분동안 공 3개 던지는 환장하는 인터벌을 지니고 있다. 현역 중 인터벌 느린 투수로는 꼭 손꼽히는 투수. 이때문에 도루 저지 및 견제에 불리한지라 한화와의 시범 경기에서 홈스틸을 허용하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다.
평균적으로 인터벌이 빠를수록 타자에게 수싸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적게 주기 때문에 투수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고, 야수들 또한 지치기 때문에 인터벌이 느려서 좋을 것이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저 성적을 낸 것이니 역설적으로 임창용의 구위를 보여준 셈.
임창용 여담 일화
묘하게 이연걸하고 닮았다. 형제처럼 닮았다. 시카고 컵스로 이적한 임창용. 이젠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분과도 묘하게 닮았다.
투수이지만 발이 대단히 빠른 걸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 드물지만 대주자로 나오곤 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편이다.
삼성에 있을 때에 프런트나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던 것과 달리 정현욱, 권오준,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등의 삼성 시절 후배들은 임창용을 많이 따른다. 특히 이들 중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과는 비시즌 기간에 같이 여행을 가거나 당구치면서 밥값 내기를 한다고. 다만 이승엽과는 2000년대 전반기에 사이가 안 좋았다는 설이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나돌고 있다. 임창용이 중무리 투수로 고생했는데 스포트라이트는 홈런왕인 이승엽이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하는 모습을 보면 둘이서도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은듯.
자신의 전성기가 해태에서의 4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연도를 적자면 1995~1998년. 또 삼성으로 이적한 뒤 2~3년간도 페이스가 좋았다고 언급했다.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8년을 포함해 1998, 1999, 2000년 동안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동시에 김응용 전 사장이나 선동열 전 감독도 구위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날아다닌 걸 보면 일본 시절이 진짜 전성기 같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임창용의 보직이 중무리 투수였다는 점. 야쿠르트에서처럼 철저하게 1이닝 마무리로서 관리를 받으며 등판하는 것과 비교하기 힘들다. 일본의 야구 팬들은 임창용의 대한민국 시절 스탯을 보고 저렇게 혹사를 당하고 부상을 안 당한 게 이상하다는 반응이 대다수댜.
해태 타이거즈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 본 유일한 선수이다. 서재응, 최희섭, 김병현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메이저로 갔기 때문에 조금 다른 케이스.
일본 진출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임창용의 성인 '임'을 일본어로 イム라고 적는데, 이를 합치면 일본 한자로 부처{仏(佛)}를 의미하는 글자가 되기 때문. 2채널의 응원 스레드에는 임창용이 등판할 때 イムイム로 도배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통칭 미스터 제로로 통한다. 일본에서 무실점 경기를 오래 이어가서 붙은 별명인데 이후 기록과 상관없이 한국에서도 쓰이기도 한다. 야쿠르트에서 미스터 제로라 불릴 수 있는 선수로는 2008년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다카쓰 신고뿐이었다. 참고로 임창용(林昌勇)이라는 이름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하야시 마사오'라는 평범한 일본식 이름이 되는데 일본시절 동료들이 매직으로 그의 모자에 ハヤシマサオ라고 카타카나로 써주면서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고 한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에 동그랑땡을 싸온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동그랑땡만 자꾸 뺏어먹어서 그만 먹으라고 했더니, 반찬에 침을 뱉고 도망치길래 화가 나서 포크수저를 던졌는데 그만 포크수저가 친구 머리에 꽂혀버렸다.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올래 야구할래라고 물어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싫었던 임창용 어린이는 야구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니폼을 가져왔더니 부모님은 유니폼을 도로 무르려 했다고 한다.
임창용의 별명 중 하나로 "창드"가 있다. 그룹 빅뱅 소속 가수 권지용이 G-드래곤을 예명으로 사용하는데 이걸 본따 팬들이 진갑용을 갑드라고 불렀다. 그래서 임창용은 창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에 쓰인 한자는 龍이 아니라 勇이다. 2012년에 심창민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부 삼성 팬들은 시속 150km대의 속구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과 이름에 창이 들어간다는 점 등을 임창용과 연관지어 "심창드"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칭찬하는 뜻이다. 사실 한국프로야구 사이드암 투수 중에선 거의 전설적인 존재라서, 딱히 삼성 투수들 말고도 사이드암으로 누군가가 조금만 잘던지면 순식간에 그 선수는 XX의 임창용, X창용이 된다. 물론 그 중에 원판을 뛰어넘은 투수는 지금까지 없다.
2003년에 이혼을 한 적이 있다. 이모씨와 2003년 1월에 혼인신고를 했고, 2월에 이혼 신청을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카더라들이 있지만 적당히 걸러 듣자. 이후 재혼해서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마구마구2 for kakao에서 2014년도 선수가 추가될 때, 2014 임창용은 처참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최고등급 8볼 플래티넘으로 나왔다.
마찬가지로 마구마구에서도 2014 임창용이 레어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특정팀에게 너무 퍼주는게 아니냐고 유저들이 반발하였지만, 수정따위 그런 거 없다.
전성기였던 1999년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진필중과 비교된 적도 있었는데, 그해 중무리를 한 임창용은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역시 중무리로 돌던 진필중이 구원승을 더 따는 바람에 임창용은 세이브포인트 딱 1P 차로 구원왕을 놓쳤다. 그러나 서로 거의 비등비등했던 1999년 외에는 정확하게 비교가 불가능한데 1998년까지 진필중은 선발을 겸업했으며, 이후 2002년까지 진필중이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반면 2000년에는 임창용이 안식년을 가졌고, 2001년부터는 선발로 전향하였다. 그리고 임창용이 다시 마무리로 전향한 2004년 진필중은 먹튀가 되어있었다. 확실한 건 이후의 행적까지 비교하면 진필중이 임창용에게 밀린다는 사실이다.
2017년 2월 18일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 갱신 기간이 지난 일본 운전면허로 무면허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30만엔(약 302만원)을 내기도 했다.
이승엽이랑 공통점이 많다. 같은 1976년생 동기에, 둘 다 고졸연고 자유계약 입단,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전성기를 이끌었고, 둘 다 일본진출 경력이 있으며 성구회 회원인 점, 2017년 겉보기에 죽쑤는 것 같아도 의외로 잘한다.
2017년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선발등판 없이 규정이닝을 기록한 선수이다. 1999시즌에 138.2이닝을 선발등판 없이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하면 임창용이 대명사 수준으로 불리우고 있다. 사이드암으로 강속구를 뿌리는 유망주 투수가 나오면 '제 2의 임창용' 또는 '○○의 임창용'이란 수식어가 종종 언급되며 니코동에서 프로야구 게임 관련 영상, 특히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선수 육성 과정을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테크로 타면 십중팔구 임창용이 언급된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 고작 4시즌 밖에 뛰지 않았지만 고향팀에 대한 애정은 그 이후로도 한결같았는데, 생애 첫 FA 요건을 갖춘 2004년에는 소속팀 삼성과의 불화도 아랑곳 않은 채 시즌 내내 KIA 타이거즈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았으며 시즌 후 협상 과정에서도 삼성과 2년 18억원의 계약을 맺은 뒤 KIA로의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돌출 행보로 구설수에 올랐다. 선수 본인도 고향팀에 가고 싶어했고, 부모님도 고향팀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결국 FA계약 하루만에 계약무효를 외치는게 말이 되냐며 삼성이 들고나와 임의탈퇴 위기까지 몰리고 KIA 또한 FA 시장 철수로 인해 임창용의 영입을 거부하면서 모양새가 꼬였지만 훗날 일본에 진출하여 화려하게 재기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인 셈. 2011년에는 "가능하다면 마지막 시즌을 KIA에서 보낸 뒤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고향팀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는데 그로부터 5년 후 드디어 고향 팀에 돌아왔다. 그러나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 도박하다 걸려서 삼성에서 방출당해서 기아로 갔으니 임창용이나 기아나 좋은 소리는 못들었다. 삼성 시절에 세이브든 승리든 담담한 표정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다르게 기아 시절에는 그런대로 경기 내용이 좋으면 표정을 밝게 짓는 편이다. 그리고 2017년 시즌 후 2번째 FA 기회가 왔지만 "나는 KIA에서 1년, 1년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면서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KIA에서 방출당하면서 임창용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유망주 시절에는 타격 재능도 있었던 선수다. 광주일고와의 친선경기에서 김병현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고, 3학년 때는 충암고와의 화랑대기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프로에서는 1998년 4월 27일 OB(현 두산)전에서 4-2로 앞선 9회초 2사 1·2루서 상대 마무리 진필중을 맞아 2타점 좌월 2루타를 기록한 뒤 세이브를 올렸다.
프로 누적년도가 쌓이면서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록이 나올 때 던졌던 기념구를 잘 챙기지 않고, 그 대신 경기가 끝나고 해당 기념구를 관중들에게 나누어준다. 아마도 기념구 하나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 기록을 눈으로 본 관중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의미인 듯 하다.
사실상 2018 시즌 끝으로 KBO 복귀가 힘들어진 가운데 2019년 1월 2일 대만언론 'SETN'은 "임창용이 2018 시즌을 마치고 KIA 타이거즈에서 방출된 뒤 에이전트를 통해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대만 구단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매체는 "임창용은 지명도가 있지만 이닝 이터 능력이 의심받고 있다. CPBL 구단들이 대부분 선발형 외국인 투수를 찾고 있어 임창용의 리그 진출은 쉽지 않다"며 임창용의 대만행을 회의적으로 봤다.
초등학교 때 농구를 해 봤다고 한다. 그래서 2019년 11월 23일, 전주에서 펼쳐질 전주 KCC 이지스 vs 안양 KGC 인삼공사 전에서 시투를 하였다.
야구를 하는건 재밌지만 보는건 재미 없다고 한다.
자신은 롤모델이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을 당시에는 키가 176cm를 기록했는데, 23살 때까지 키가 계속 커서 182cm까지 성장했다고 한다.
2021년 3월 24일부로 팬더TV에서 'BJ창드'라는 이름으로 BJ 활동을 하고 있다. 유튜브나 아프리카 냅두고 벗방 전문인 하꼬 플랫폼에서 방송을 하는 이유는 팬더TV 사장과 친구라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썰이 있다.
2021년 3월부터 사회인야구 4부 성남SB리그 소속의 팀인 도깨비 야구단에서 뛰고 있는게 밝혀졌다. 4부리그라서 전력으로 던지지는 않고 일부러 110~120km/h대의 구속으로 던지고 있다고 한다.
가족들이 성남시 판교 쪽에 거주하고 있어 비시즌에는 판교에서 지내고, 시즌 중에는 임창용 혼자 가족들과 떨어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나 서울 원정을 올 때 가족들을 만난다고 한다. KIA에서 방출된 뒤에도 광주 집을 정리하고 판교로 올라가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하며, 위에도 언급했듯이 성남시 사회인야구 리그에서 뛰는 걸 보면 은퇴 후에도 판교에 계속 거주하는 듯 하다.
야구 레슨장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우승 보너스에 대해서 썰을 간략하게 풀었는데, 본인이 해태에 있던 시절 우승한 시즌인 1996년, 1997년과 삼성에 있던 시절 우승한 시즌인 2002년, 2006년, 2014년 5번의 시즌의 우승 보너스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해태에 있었을 당시 천만원대였고, 삼성에 있었을 당시 억대였다고 밝혔다.
임창용 논란 및 사건 사고
2003년 간통죄 피소 및 이혼사건
간통이 형사처벌이 될 수 있는 죄목으로 남아있었던 2003년, 임창용은 외도행각이 발각되어 당시 부인이었던 이씨에게 피소당하게 된다.
당시 상황은 좀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임창용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은 사실 임창용이 유부남인지도 모르고 사귀고 있었으며, 그의 직업도 정확히 몰랐다. 임창용은 그녀에게 자신을 테니스 선수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임창용에 대해 검색을 해보자 유부남인 것을 알게되었다.
한 번 더 통수였던 건, 또다른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제3의 내연녀는 임창용이 부인과 결혼하기 전부터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제3의 내연녀의 존재를 알고 난 제2 내연녀가 자신과 부인 모두 임창용에게 속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임창용은 이에 대해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아서, 부인인 이씨에게 남편의 외도 사실을 직접 알리기로 한다.
결국 임창용은 피소당하고 삼성 구단의 중재 끝에 협의이혼으로 마무리된다. 2003년 당시는 야구선수의 불륜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지, 2010년대 이후 야구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인터넷 상에서 임창용의 멸칭, 즉 비하용 별명이 "임간통"인게 이 사건 때문이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오재원을 향한 2루 견제 논란
고액 세금 체납
2020년 12월 6일, 국세청이 2억원 이상의 세금을 1년 이상 체납한 고액·상습체납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임창용이 종합소득세 3억원을 체납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12월 16일 공개한 체납자 명단에도 다시 올랐다.
사기 혐의 피소
지인에게 빌린 돈 1,500만원을 갚지 않아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2020년 7월, 임창용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오던 서울 강남 유흥업소 직원인 30대 여성에게 2,500만원을 빌렸으나, 1,000만원을 갚은 후 나머지 1,500만원을 갚지 않은 상태에서 연락을 끊었고, 이에 피해자는 임창용을 사기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고소가 접수된 후 11월 25일 서울 강남경찰서가 서울중앙지검으로부터 사건을 이송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피해자는 "임창용이 사업에 돈이 필요하니 빌려주면 2~3시간 내로 갚겠다고 했지만, 개인 채무변제에 썼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피해자에 따르면 임창용은 500만원부터 1,000만원에 이르는 고액의 도박성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강남경찰서는 2020년 12월초 고소인 조사를 마친 뒤 임창용에게 출석 통보를 했지만 임창용은 경찰 소환에 불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2021년 4월 27일, 결국 강남경찰서는 임창용을 사기 혐의로 검찰 송치(불구속 기소의견 송치)했다. 결국 6월에 약식 기소로 벌금 100만원이 나왔다. 과거 도박,사기로 구속기소가 되어서 실형을 선고 받아서 전과자로서 상습범이나 누범으로 가중처벌되었다.
상습도박 혐의 집행유예
2022년 7월 25일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이후 또 다시 도박을 하다 적발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벌금 300만원 선고되었고 사회봉사 40시간 명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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